테크M에서는 e스포츠 리그 현장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장면 가운데 하나를 꼽아 분석하는 '결정적 e장면' 코너를 새롭게 선보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편집자 주>


/그래픽=이소라 기자
/그래픽=이소라 기자

e스포츠가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첫번째 원동력은 스타일 것이다. 그리고 그 스타를 더욱 반짝반짝하게 빛내줄 수 있는 존재는 바로 '라이벌'이다. '라이벌'은 보는 사람도 재미있고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에게도 확실한 동기부여가 된다.

스타크래프트 리그에서는 SK텔레콤과 KT가 숙명의 '통신사 라이벌'이었다. 임요환과 홍진호가 '임진록'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이영호와 이제동이 '리쌍록'으로 '라이벌'의 정점을 찍었다.

라이벌은 시대가 바뀌어도, 팬들의 머리에 오랫동안 기억되게 하는 힘이 있다. 20년 전이지만 아직도 2000년에 e스포츠를 시청한 사람들은 임요환과 홍진호의 이름은 잊지 않기 때문이다.


카트라이더 최고의 라이벌, 문호준-유영혁


카트라이더 리그에서 10년 동안 라이벌 구도를 유지하고 있는 선수가 있다. 한화생명e스포츠(한화생명) 문호준과 아프리카 프릭스(아프리카)유영혁이다. 두 선수는 오랜 기간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개인전 경기만 치러졌을 때는 문호준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지만 팀전으로 바뀌면서는 서로 우승을 주고 받으며 더욱 라이벌다운 면모를 갖췄다. 두사람은 다양한 카트라이더 대회에서 결승전에 만나 명장면을 연출했다.

한화생명e스포츠 문호준(왼쪽)과 유영혁/사진=이소라 기자
한화생명e스포츠 문호준(왼쪽)과 유영혁/사진=이소라 기자

카트라이더 개발팀을 괴롭게 만든 것 역시 라이벌의 명승부였다. 당시 카트라이더는 기록을 소수점 둘째자리까지 보여주는 시스템이었다. 사실 그 이하까지 치열하게 승부가 펼쳐지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 시스템은 바뀔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문호준과 유영혁이 소수점 둘째짜리까지 동점인 명승부를 연출했다. AI가 더 빠른 선수를 가려내긴 했지만 화면에 표시된 기록은 같았다. 결국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카트라이더 개발팀은 기록을 소수점 셋째자리까지 표기하기에 이르렀다. 

카트라이더 시스템을 바꿀 정도로 최고의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문호준과 유영혁. 두명의 맞대결이 카트라이더 리그의 역사였고 그들의 승부는 항상 명승부를 연출했다. 


팬들의 기대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라이벌도 나이를 먹는다. 어렸을 때는 너무나 쉽게 하던 드리프트가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나이를 들어가면, 피지컬이 떨어진다는 점을 팬들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팬들은 그래도 라이벌을 보고 싶어 한다. 그들의 경기력이 떨어졌어도... 두명이 한 화면에 잡히고, 그들이 경기하는 장면을 기다린다. 그것이 라이벌이 주는 설렘과 매력이다.

문호준과 유영혁의 관계도 그렇다. 박인수, 이재혁 등 새롭게 떠오르는 선수들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문호준에게 최고의 라이벌은 결국 유영혁이다. 두사람이 그동안 쌓아온 스토리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지난 21일 카트라이더 리그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생명과 아프리카의 맞대결이 결정되자마자 많은 사람들은 기도하기 시작했다. 제발 에이스 결정전까지 경기가 이어지게 해달라고. 그래서 오랜만에 문호준과 유영혁의 경기를 보고 싶다고.


현장을 가득 메운 설렘


사실 에이스 결정전을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두팀 모두 2대0으로 경기를 끝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기 전 만난 문호준은 "아무래도 2대0으로 이기거나 0대2로 패할 것 같아 에이스 결정전을 준비하지 않았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경기 전부터 현장은 설렘으로 가득찼다. 만나면 모두들 문호준과 유영혁 이야기 뿐이었다. 모두들, 과연 에이스 결정전을 갈 수 있을지, 그리고 누가 이기게 될지 이야기 하느라 바빴다. 

신은 관계자들과 팬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았다. 1세트 스피드전을 한화생명이 가져갔고, 2세트는 유영혁의 활약 덕에 아프리카가 승리했다. 드디어 모두가 고대하던 에이스 결정전이 성사된 것이다.

모두들 꿈꾸던 매치가 성사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팽배했다. 현장을 둘러싸고 있는 설렘 분위기는 엄청났다. 온라인에서도, 경기를 시청하던 시청자들은 문호준과 유영혁의 경기를 보기 위해 모니터 앞을 떠나지 못했다.


문호준이 유영혁에게 화가 난 이유... 결정적e장면


당연히 문호준과 유영혁의 맞대결을 기대하던 우리는, 화면에 나온 장면을 보며 눈을 비벼야 했다. 과연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장면이 사실인건지, 혹시 카메라 감독님이 선수를 착각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

결정적e장면, 에이스 결정전에서 한화생명은 팬들의 바람대로 문호준이 나왔지만 아프리카는 김기수를 내보냈다.
결정적e장면, 에이스 결정전에서 한화생명은 팬들의 바람대로 문호준이 나왔지만 아프리카는 김기수를 내보냈다.

한화생명은 문호준이 등장했지만 아프리카에서는 김기수가 나왔다. 전 시청자와 현장에 있었던 관계자들 모두 문호준과 유영혁의 경기를 보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것만, 그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것이다.

김기수가 화면에 잡히는 순간,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이 빠진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김기수가 나올 수도 있다. 그가 요즘 유영혁보다 폼이 더 좋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까. 

하지만 팬들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문호준은 알았고 유영혁은 몰랐던 것 같다. 누가 지든, 이기든 아마도 팬들은 '클래식 라이벌'인 문호준과 유영혁의 경기를, 그것도 높은 곳에서 맞붙는 두사람의 경기를 보고 싶었을 것이다.


시작 전부터 결정된 승부


모두의 예상대로 김기수는 문호준을 넘지 못했다. 문호준은 실력이 정상급에 올라와 있는 박인수, 이재혁조차 이기기 힘들어하는 최고의 기량을 가진 선수다. 게다가 멘탈과 경험까지 완벽하다. 김기수가 아무리 잘한다 해도 상대가 되지 않다는 것을, 유영혁은 과연 몰랐을까?

경기가 끝이 난 뒤 문호준은 화가 많이 나있었다. 이겼지만, 팀을 준결승전에 올려 놓았지만 별로 기쁘지 않아 보였다. 이겨도, 이긴 것 같지 않은 찝찝함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문호준은 이례적으로 방송 인터뷰와 영상 인터뷰를 통해 유영혁에게 날선 말들을 쏟아냈다. 문호준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누군가에게 뼈아픈 이야기를 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문호준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전성기 시절 그들이 미친듯이 잘하는 경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저 두사람이 맞붙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하고 즐거운데, 그것을 유영혁이 부순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화가 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스타'는 팬들의 부름에 응답해야 한다


경기 후 너무나 궁금해 유영혁에게 물어봤다. 유영혁은 "(김)기수가 너무 자신 있어 해서 차마 내가 나간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며 "그날 스피드전에서 너무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줘 위축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다. 팀의 승리가 중요했기에, 객관적으로 당일 컨디션이 좋은 김기수가 나간 것은 팀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다. 개인의 명예보다 팀 승리가 더 중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말 유영혁은, 김기수가 문호준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을까? 개인전 우승자이자 시즌 내 트랙 레코더를 밥먹듯 갈아 치우며 승승장구하던 이재혁조차 하지 못한 일을, 과연 개인 타이틀 하나 없는 김기수가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다. 아마도 이기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유영혁은 도망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관심이 불편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유영혁은 그런 것을 고민할 위치가 아니다. 팬들의 요구에 즉각적으로 응답해야 하는 '레전드'이고 '스타'다. 도망가는 것은 옳은 선택이 아니다. 

문호준은 팬들의 부름에 응답했고, 유영혁은 외면했다. 이번 시즌 가장 아쉬운 장면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결정적e장면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어쩌면 유영혁의 프로게이머 인생에서의 최악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소라 기자 sora@tech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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