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성 앞세운 텔레그램
#사이버망명지에서 성범죄 소굴
#증권맨은 억울해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착취한 디지털성범죄물이 공유된 일명 '박사방', 'n번방' 사건이 수면위로 드러나면서 국민적인 분노와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영상을 소비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26만명의 이용자를 모두 처벌해야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사회적 파장이 큰 만큼 정부가 정밀한 수사로 관련자들에게 엄격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런데 최근 억울하게도 n번방 사태와 무관한, 일반 텔레그램 사용자에 대한 혐오가 온라인상에서 번지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온라인커뮤니티 등에는 "텔레그램 이용자는 믿고 걸러야한다"는 혐오글이 쇄도하고 있다. 정말 텔레그램 이용자는 모두 잠재적 성범죄자인 걸까. 그리고 성범죄자들은 왜 카카오톡이나 라인이 아니라 텔레그램을 주 유통수단으로 활용한 것일까.
'사이버 망명'으로 시작된 텔레그램 열풍
독일에서 탄생한 텔레그램은 러시아 개발자들이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폐쇄형 웹브라우저 '토르'와 마찬가지로 이용자의 익명성을 보장하며, 메신저 정보를 쉽게 지울 수 있고 외부검열을 받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미국에 본사를 둔 여타의 메신저 업체들처럼 각국 정부의 압박에도 쉽게 데이터를 넘기지 않는다는 이미지까지 얻었다.
국내에서 텔레그램이 주목받기 시작한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6년전인 지난 2014년이다. 당시 경찰이 정진우 노동당 전 부대표의 카카오톡 계정을 압수수색하며 2300명에 달하는 카카오톡 친구 정보와 대화내용 등을 수집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이 사건은 '민간인 사찰' 논란으로 번지면서 정부가 카카오톡을 검열하고 있다는 소문이 확산됐다. 이로인해 서버 압수수색이 불가능한 외산 SNS로 떠나는 이른바 '사이버 망명'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텔레그램은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익명성을 강조한 공간으로 부각돼 한달새 무려 100만명의 이용자를 모았다. 특히 민감한 투자정보를 공유하던 여의도 증권가에선 텔레그램이 업무용 메신저로 쓰이기까지했다. 지난 2017년 말부터는 가상자산(암호화폐) 발행업체들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가상자산 투자정보를 공유하고 홍보하는 채널로도 활용됐다.
'웹하드·텀블러'사라지자 악마들은 텔레그램에 모였다
'익명성의 수호자'로 불렸던 텔레그램이 국내 성범죄자들의 활동공간이 된 것은 지난 2018년 이른바 '양진호 사건'으로 불리는 웹하드 카르텔이 수면위로 떠오르면서다. 당시 웹하드를 통해 디지털 성범죄 영상물이 대거 유통되자, 정부는 관련 수사를 본격화해 관련자 대부분을 처벌하고 웹하드 시장을 점검했다. 이를 통해 웹하드에서 공급되는 디지털 성범죄물 상당수가 삭제됐다.
그러자 갈곳을 잃은 성범죄자들은 정부의 감독을 피할 수 있는 미국 SNS로 대거 이동했다. '텀블러'라는 SNS가 대상이었다. 정부는 텀블러 본사를 통해 압박을 이어갔다. 그러자 텀블러에 기생하던 '악마'들은 텔레그램으로 이동했다. 익명성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범죄사실을 숨길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점차 조직화된 텔레그램 채팅방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수백여명이 모인 텔레그램 단체방에서 개인들이 음란물을 주고받는 것에서 그쳤다. 하지만 웹하드에서 활동했던 음란물 유통업체들이 진입하면서 조직적으로 텔레그램 계정을 만들고 음란물을 유통, 심지어 자사 성인사이트를 홍보하는 채널로도 활용했다.
n번방 사건 이전에도 이같은 채널에서 미성년자 관련 음란물 등 유해 콘텐츠가 다량 유통됐다. 이에 정부는 지난해부터 별도조직을 꾸리고, 텔레그램 범죄조직 소탕에 나섰다. 그러면서 n번방과 같은 까다로운 진입과정을 요구하는 채팅방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정부가 133개에 달하는 단체 대화방을 삭제 조치한데 이어, 이번 '박사방' 소탕까지 성공한 것이다.
텔레그램 이용자는 모두 범죄자? 가짜뉴스 입니다
이 과정에서 텔레그램은 불법물의 온상이라는 멍에를 뒤집어 썼다. 그러다보니 국내 텔레그램 이용자에 대한 혐오가 급격하게 번지고 있다. 페이스북과 네이버 지식인 등을 통해 손쉽게 텔레그램 혐오글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국내 텔레그램 이용자들 중 상당수는 선량한 사람이다. 지난 2014년 이후 감청을 피해 텔레그램으로 옮겨온 정치인들과 여의도의 증권맨들, 강남에서 여전히 바쁘게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블록체인 개발사들 대부분 여전히 텔레그램을 사용한다. 텔레그램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쁘게 이용한 사람들이 문제라는 얘기다.
그리고 텔레그램에 대한 글로벌 각국의 단속이 강화되면 과거 웹하드와 텀블러의 사례처럼, 성범죄자들은 또다시 새로운 플랫폼을 찾아 떠날 것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과거 텀블러가 음란물의 온상이라는 지적을 받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텔레그램이 그 지적을 받고 있고 심지어 텔레그램을 이용하는 이용자들까지 손가락질 받고 있다"며 "하지만 이는 특정 서비스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서비스를 불법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텔레그램이 정부 수사에 협조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적극 협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아무리 익명성이 보장된 메신저라지만, 이처럼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에 대해 협조할 수 있는 부분은 협조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방통위의 요구에 묵묵부답이던 텀블러 역시 음란물에 대해서는 지난 2018년 말 강력히 차단하겠다고 발표했다"고 언급했다.
이수호 기자 lsh5998688@tech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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