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예약 대란' 부른 대기업 참여제한 제도

#그럼 다시 공공사업 대기업이 다 하면 OK?

#대기업-중소기업 이분법 벗어나 동등한 '판'부터 깔아야


26일 55~59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됐습니다. 실제 접종보다 힘들었던 건 예약이었습니다. 백신 접종 사전 예약시스템이 '먹통'이 되면서 예약을 서두른 많은 이들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IT의 힘으로 코로나19를 슬기롭게 극복해 온 'K-방역'의 아쉬운 모습이었습니다.

/사진=트위터
/사진=트위터

대통령까지 나서 백신 예약시스템 보완을 지시하자 최근 질병관리청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부랴부랴 LG CNS, 네이버, 카카오, 베스핀글로벌 등 민간 기업들을 데려다 놓고 대책 마련에 나섰습니다. 언론에는 정부가 중소 IT업체에 시스템 구축을 맡겼다가 백신 예약 대란이 발생하자, 결국 대기업이 나섰다는 식으로 비쳐쳤습니다.

그럼 왜 정부는 처음부터 대기업에 시스템 구축을 맡기지 않았을까요? 지난 2013년 시행된 대기업 공공 소프트웨어 사업 참여 제한 제도 때문입니다. 이 제도는 LG CNS와 같은 대기업 계열 회사들은 공공 사업에 참여할 수 없도록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법입니다.


대기업 참여제한, 잘못 휘두른 '칼'

국내 대기업들은 대부분 IT서비스 계열사를 두고 그룹사의 IT시스템 구축과 유지보수를 맡기고 있습니다. 기업 기밀이 들어있는 시스템을 경쟁사 손에 맡길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지만,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주고 총수 일가의 경영권 승계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아 늘 공정거래위원회의 눈총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민간 시장에는 중소·중견 기업들이 진입할 수 있는 틈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자연히 중소·중견 기업들은 공공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이마저도 대기업 계열사들이 저가로 사업을 수주한 뒤, 하청업체들의 공급 단가를 후려치는 관행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결국 이런 왜곡된 시장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정부가 대기업 참여제한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입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공공 사업을 통해 중소·중견 기업들에게 성장 기회를 주고, 대기업들은 해외시장 개척 등에 전념하라는 취지로 법 개정을 추진했습니다. 허나 결말은 암담합니다. 여전히 뚜렷한 민간 시장이 없는 마당에 중소·중견기업들은 마진이 낮은 공공사업에만 매달려 외형은 커졌지만 안으로는 수익성 악화를 겪고 있고, 대기업들은 공공 사업 레퍼런스가 없어 해외 진출길이 막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럼 다시 대기업 참여하면 다 해결?

지난해 원격수업 장애 사태와 이번 백신예약 대란까지, 시장을 육성한다는 정부의 역할론은 차치하더라도 결과물인 공공 IT시스템의 질적인 부분까지 문제점을 드러내며 공공 IT 제도는 총체적 난국에 놓였습니다. 그럼 이제 와서 공공 IT 이슈를 다시 '대기업 만능주의'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대기업 참여제한이 실패한 정책이라 할지라도, 그 배경과 취지는 여전히 살아있는 이슈입니다. 온라인 수업과 백신예약 먹통 때마다 매번 '구원투수'로 나서고 있는 LG CNS의 경우 국내에서 전자정부 구축 경험이 가장 풍부한 업체 중 하나입니다. 수많은 프로젝트를 통해 정부 기관의 시스템 구조를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를 찾거나 해결하는 데 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청년들이 '경력직만 뽑으면 신입은 어디서 경력을 쌓느냐'며 한탄하지 않습니까? 애초에 대기업 참여를 제한한 이유는 중소중견기업들도 이렇게 공공에서 경험을 쌓아 하청에서 벗어나 스스로 성장할 기회를 주자는 취지였습니다. 이 제도를 8년 동안 끌어 놓고, 이제와 중소기업이 실력이 없다고 다시 대기업 계열사에게 사업을 몰아 줘야 한다고 주장할 순 없는 노릇입니다.

물론 현 코로나 사태는 국가 비상 시국인 만큼, 당장 시스템이 제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게 맞습니다. 중소기업이 하기 어려우면 대기업이라도 나서는 게 맞죠. 하지만 그동안 제도를 개선한다며 법 취지와는 반대되는 '예외' 가능성만 계속 넓혀주고도 국가적 재난 사태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건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를 떠나 제도 운영의 미숙함이 이번 사태를 부른 더 큰 원흉이 아니었을까요?


정책 실패 인정하고 새판 짜야

지난 8년 간 시행된 대기업 참여제한 제도는 당초 의도했던 중소·중견 소프트웨어 기업의 성장과 IT서비스 시장의 왜곡을 해소하려던 의도를 살리지 못하고 '모두가 지는 게임'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백신예약 사태도 명백한 '정책 실패'로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애초에 대기업을 막으면 중소기업이 성장할 것이란 '이분법'적 논리가 시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던 까닭입니다.

앞으로의 제도 개선은 지금처럼 대기업 참여 '제한'의 범위 만을 논하기 보단, 근본적으로 어떻게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대등한 입장에서 '상생'할 수 있는 판을 깔아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대기업 참여제한 제도가 만들어졌던 취지와 배경을 다시 돌아보고, 이를 더 잘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근본적으로 다시 고민해야 할 시점이 온 것 같습니다.

공공 사업은 그 자체로 수익성이 높은 사업은 아닙니다. 대신 이를 바탕으로 해외 진출 등의 신성장동력을 만드는 마중물이 되는 게 가장 좋은 방향입니다. 과거 LG CNS의 교통카드 사업의 해외 진출이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아마존웹서비스(AWS)도 공공 사업을 발판으로 신뢰를 쌓으며 세계 최고의 클라우드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대기업의 자본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전문성을 갖춘 중소·중견 기업이 협업해 더 수준 높은 시스템을 만들고, 이를 통해 수출을 활성화해 전체 소프트웨어 산업 경쟁력이 높아진다면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이 시장에서 서로를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중소기업은 못하니 대기업이 해야 한다거나, 대기업이 하면 중소기업은 다 죽는다는 식의 이분법은 더 이상 생태계를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시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모두가 성장할 수 있는 판을 정부가 다시 고민해주길 기대합니다.

남도영 기자 hyun@tech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