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콘텐츠 트렌드는 장르와 포멧이 해체되며 외부의 것들을 수용하는 컨버전스
시장이 성숙할수록 '콘텐츠를 기획하고 실제 만드는 개인'의 가치가 높아져
자본시장에서 스타의 출현은 개인의 영광 그 이상의 나비효과 가져와
강숙경 작가의 탄생은 예능 스튜디오의 산업화와 함께 K예능의 비상으로 이어질 것
모 방송 채널에서 즐겨보던 예능이 끝나고 크레딧이 오르는데 하단 자막에 신규 예능 프로그램을 알리는 스크롤이 흐른다. "7월2일, ooo PD와 '피지컬100' 강숙경 작가의 '2억9천 : 결혼전쟁'" 순간, 이를 핸드폰으로 찍어 두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콘텐츠 산업 전문가라는 직업 탓에 온갖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아서지만, 대한민국 예능 판에서 '작가 이름'을 팔아 콘텐츠를 홍보하는 일은 매우 희소하기 때문이다. 이후 진행된 제작 발표회에서도 강숙경 작가는 대한민국의 현재 결혼율과 (프로그램의 제목이기도 한) 2022년 기준의 평균 결혼 자금 '2억9천만원'을 날카롭게 꺼내들며 행사의 중심에 섰다.
그간, 대한민국 예능 판에서 작가는 왜 주인공이 아니었는가. 이 설명을 위해서는 영화·드라마 산업과의 비교가 필요하다. 통상 '영화는 감독, 드라마는 작가의 것'이라고 한다. 영화 판에는 스타감독이, 드라마 판에는 스타 작가들이 즐비하게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참고로 한국시장은 대부분의 영화 감독이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작가'의 역할을 겸함).
반면, 예능 산업은 다르다. 영화나 드라마 대비 상대적으로 낮은 제작비로 만들어지는 터라, 외부의 자금 수혈없이 TV방송국 산하의 프로듀서(PD) 영향력이 막강했다. 게다가 2000년대 중반 짜여진 각본을 벗어나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 시대가 열리면서 PD의 현장 지휘력은 더 중요해 보였다. 이런 흐름에서 강숙경 작가의 등장은 더 반갑다. 그녀는 군인과 특수부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인 '강철부대'와 영국 BBC 방송에서 K리얼리티의 전세계 흥행으로 보도되기도 한 '피지컬100'에서 소외받거나 몸을 쓰는 직업군을 재조명하는 등, 리얼리티에 늘 사회적 담론을 입혀왔다.
이번 '2억9천 : 결혼전쟁' 역시, "2억9천만원만 있다면, 결혼에 필요한 모든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하십니까"로 따끔하게 시작하며 커플 서바이벌로 치닫는다. 결과값으로 과정을 증명해내야 하는 냉혹한 시대상에 ‘신체’라는 예능 도구를 입히는 것이다. 사회적 결핍을 콘텐츠에 투영하는 ‘강숙경 세계관’이 정착되어가고 있는 즈음이다. 그렇다면, 지금 왜 예능은 작가의 시대를 열고 있는가.
해체되고 융합되는 예능
최근의 콘텐츠 트렌드는 의심할 여지없이 컨버전스(Convergence)이다. 장르와 포멧이 해체되며 외부의 많은 것들을 수용한다. 물론 콘텐츠 컨버전스는 콘텐츠 전역에 걸쳐 일어나는 움직임이긴 하다. 그럼에도 예능은 정통 드라마나 영화에 비해 포맷이 열려있어 물만난 물고기처럼 더 자유로워졌다. 요리, 여행, 낚시같은 취향과 결합되거나 지식 정보를 제공하고 골프, 야구, 축구에 더 나아가서는 리얼 다큐에 범죄 추리까지 무궁무진한 소재들과 결합되며 컨버전스의 진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예능'이라는 단어에 구겨넣는 것이 적합한가에 대한 논의마저 필요할 지경이다. 즉, 90년대의 코미디와 2000년대의 연예오락 방송을 지나 지금 예능은 컨버전스 트렌드를 온전히 흡수하며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오는 중이다.
두번째로는 예능 시장이 산업화의 물꼬를 트고 있다는 점이다. 유튜브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라는 정보통신(IT) 유통망을 타고 한국 예능은 글로벌 기류를 탔다. 김태호PD의 '테오', 송은이의 '컨텐츠랩 비보' 등이 100억원대의 벤처 캐피탈 투자를 받고 '솔로지옥'과 '피지컬100'은 넷플릭스를 통해 190개국에서 K리얼리티쇼의 글로벌 바이럴을 만들어냈다. 중소 예능 제작사들도 각자만의 방식으로 자본과의 연대를 꾀하는 중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흥미롭다. 콘텐츠 시장은 성숙할수록 투자유통사나 제작사가 아닌 '콘텐츠를 기획하고 실제 만드는 개인'의 가치가 높아진다. 시장이 커져 금융자본이 결합될수록 오히려 크리에이터 중심의 세계가 열린다는 점이 아이러니하지 않는가. 산업적으로 가장 먼저 완성된 영화산업을 예로 들겠다. 대중은 CJ '기생충'이 아닌 봉준호의 '기생충', 롯데 '모가디슈'가 아닌 류승완의 '모가디슈'로 기억한다.
시장이 성숙할수록 개인 크리에이터가 주목받는다
게임 산업은 어떠한가. 과거 넥슨의 게임, 스마일게이트의 MMORPG로 부르던 시대를 지나 지금은 강원기의 '메이플스토리', 금강선의 '로스트아크' 이지 않는가. 2023년의 게임 유저들은 더 이상 '3N(NC소프트, 넥슨, 넷마블)'이나 의장님이 아닌 개인의 이름을 기억하며 스타 강원기, 스타 금강선과 소통한다. 이처럼 예능 역시 개인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혹자는, 고작 스타 예능작가 한두명의 출현에 웬 호들갑이냐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이 흐르는 시장에서 스타의 출현은 개인의 영광 그 이상의 나비효과를 가져온다. 언론과 플랫폼, 대중이 예능 작가를 주목한다는 것은, 그 산업의 잠재성과 더불어 제2, 제3의 강숙경이 등장할 것임을 예고한다. 또한, 업계 위상이 상승하면 누군가를 롤 모델로 치열하게 올라가는 뉴비 작가들이 꿈을 꾼다.
머지않아 대학에 예능학과가 신설되고 예능인을 육성하는 교육 플랫폼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과거, 웹툰 시장에서 숱하게 돌던 우스갯 소리가 있다. 웹툰 판에서 연봉 수십억원 대의 작가들이 서넛 나오더니 대한민국 웹툰 산업이 퀀텀 점프를 했다는 것이다. 연이어질 강숙경 작가의 탄생은 예능 스튜디오의 산업화와 함께 이제 막 물꼬를 튼 K예능의 비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미국의 스타작가 '숀다 라임스1'의 이름을 딴 숀다랜드 스튜디오가 기업이 되고 그녀가 프로듀서를 넘어 레전드한 '쇼러너2'가 된 것처럼 말이다.
가끔 영화감독들로부터 본인 영화를 평단에서 본인도 생각치 못한 담론으로 이어갈 때 곤혹스럽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혹여나 미천한 이 글이 개인 강숙경에게 어떤 부담이 되지 않기를, 한국의 예능 산업에 대한 애정으로 읽히기를 바란다. K예능을 지지하고 응원한다.
글=노가영
정리=김현기 기자 khk@techm.kr
1 숀다 라임스(Shonda Rhimes) : 세계적인 흥행 기록을 보유한 <그레이아나토미>, <브리저튼> 등을 제작한 TV작가. 넷플릭스, 방송, 웹콘텐츠 전역을 넘나들며 엔터테인먼트 역사를 씀. 작가 출신이 쇼러너로 성장한 대표적인 인물.
2 쇼러너(ShowRunner) : 작가이면서 자본을 포함한 제작 전반의 총책임자. 미국의 TV시리즈 제작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
<Who is> 노가영 님은?
트렌드북 작가이자 콘텐츠미디어 산업 전문가이다. CJ CGV와 CJ엔터테인먼트(현 CJ ENM)에서 콘텐츠 유통으로 기업생활을 시작했고 KT, SK텔레콤 등 통신기업에서 미디어 전략, 콘텐츠 투자, OTT 사업전략 리더로 성장했다. 현재는 디지털 콘텐츠 산업 구석구석과 글로벌 미디어 판에서 K-콘텐츠를 분석하고 이를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저서 집필과 강연 뿐 아니라 칼럼 기고, 유튜브, TV, 라디오 등 다양한 채널을 넘나들며 활동 중이다. 저서로 '새로운인류 알파세대', '2023콘텐츠가 전부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