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사람에 따라 장르가 달라지는 소설은 기묘하다. 여기 김쿠만 장편소설 '신들린 게임과 개발자들'이 그러하다. 책은 게임회사에 취업한 신입사원 대호의 이야기를 그렸다. 회사를 배회하는 귀신을 맞닥뜨리면서도 게임 개발을 이어가는 내용이 담겼다. "살면서 귀신 한 번쯤은 봐야 성공할 수 있다"나?
어두컴컴한 개발실의 2미터에 달하는 귀신이나,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외산 귀신은 아무렴 좋다. 그것보다 '진짜'는 따로 있다. 어떠한 기시감을 언급하는 작가의 말(튜토리얼)부터 이미 호러에 가깝다. 게임회사 시나리오 개발팀이 꾸린 캐릭터 설정은 소위 말하는 '높은 양반'에 의해 시시각각 바뀐다.
작가는 이때를 떠올리면서 한층 무서운 정보들을 책 곳곳에 압정처럼 흩뿌려놓았다. 예컨대 N사와 W사 스토리텔링팀과 컨텐츠기획 팀에서 각각 일했던 작가의 실제 이력이라든가, 허구를 전제로 공포를 조장해놓고 책의 말미에 허구 중에서도 실존하지 않는 것들만 따로 기재한 점이 그렇다. 그렇다면 이 책은 픽션인가 논핀션인가.
작가의 비공식 멘트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유추할 수 있다. 오는 30일 정식 발행을 앞둔 이 책을, 익명을 사용하는 직장인 앱에서 누군가 홍보하고 있었다. 자신의 책이 나왔다는 멘트와 함께다. 그러면서 책의 내용이 실화냐고 묻는 질문에 "반쯤...?"이라고 글쓴이가 답한 것.
절반의 믿음을 깔고 책을 읽으면 장르는 순식간에 돌변한다. 소설이라는 장르적 색채에 기대 마냥 웃으며 즐기기엔 뒷맛이 씁쓸하다. 등단 경력이 유일한 대호는 운 좋게 임원 면접 없이 게임회사에 취업하게 되고, 그곳에서 VR게임 귀신 캐릭터 설정을 제작하게 된다. '바이오하자드'(1996)의 정신적 후속작을 운운하는 본부장을 책임자로 두고서다.
시대상이 2033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소설은 시종일관 공포스럽다. 약 40년 전 게임을 신줏단지처럼 떠받드는 본부장은 사무라이를 떠올리게 하는 한국식 귀신 캐릭터를 호평하는가 하면, 단역에 불과하던 낚시 귀신을 자신이 낚시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사실상 새로운 캐릭터로 재탄생시키기도 한다. 창의성을 주 무기로 하는 게임업계는 과거에서 그다지 나아가지 못했다.
이런 배경 속에 개발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일이 무속신앙에 의해 이뤄진다는 사실은 콩트에 가깝다. 무당을 불러 부적을 쓰고, 살을 날리며, 점괘를 보고, 굿을 한다. 이 일로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수천만원의 지출이 발생하는데, 게임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고스란히 개발비로 책정되는 것은 실무자들에게 공포 그 자체다.
이 또한 본부장의 강력한 믿음 아래 추진된 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콩트는 더 이상 콩트로 남을 수 없다. 그렇게 수차례 기괴한 과정을 거친 게임은 구조조정과 흥행실패라는 서늘한 결과값마저 남긴다. 신입으로 입사한 대호의 팀장은 구조조정 대상자가 되어 게임 완성 전에 회사를 떠나고 대호는 단숨에 파트장이라는 직함을 단다. 정작 본부장은 구조조정 논의에서 빠진 채로 말이다.
팀장은 회사를 떠난 뒤 전 직장을 무대로 소설을 쓴다. 10년간 업계에 몸담은 이에게 남은 것은 하루아침에 얻은 실직 경험과 크게 팔리지 않은 소설 한 권뿐이다. 그런 팀장을 보며 대호는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내일이 없이, 주관도 없이 개발실을 배회하는 귀신들의 삶이 마치 자신들의 그것인 것처럼.
등단 경력을 가지고 게임회사에 입사해 스토리텔링 팀에서 일한 작가가 게임회사를 무대로 쓴 소설은 '구운몽'과 같은 환몽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작 중 팀장의 소설이 어딘지 에세이에 가깝게 탄생한 것처럼 이 책도 실은 소설의 형식을 빌린 에세이는 아닌지 의심하게 만든다. 다만 이러한 추측이 사실로 판명 났을 때야말로 우리에게 남는 것은 김쿠만의 장편 소설이 아니라 한 편의 블랙코미디가 아닌지, 묘한 뒷맛을 여운처럼 남긴다.
임경호 기자 lim@tech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