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모든 걸 바꿔 놓고 있다.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게임의 룰을 바꿔놨고, 이제 어떤 빅테크도 함부로 '왕' 노릇을 할 수 없게 됐다. 모바일 시대 가장 견고한 왕국을 건설한 애플도 마찬가지다.
애플을 겨눈 '반독점' 칼날
6일(현지시간) 인기 게임 '포트나이트' 개발사인 에픽게임즈는 자사 블로그를 통해 "애플이 개발자 계정을 해지했다"고 밝혔다.
에픽게임즈는 "디지털 시장법(DMA)에 따라 유럽 내 iOS 기기에 에픽게임즈 스토어와 포트나이트를 출시하려고 했다"며 "하지만 놀랍게도 애플이 해당 계정을 해지해 이제 iOS용 에픽게임즈 스토어를 개발할 수 없게 됐다"고 전했다. 또 "이는 DMA를 심각하게 위반하는 행위"라며 "애플이 iOS 기기에 진정한 경쟁을 허용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럽 DMA는 거대 플랫폼 사업자의 시장 지배력 남용을 방지하고자 일정한 규모의 플랫폼 사업자를 '게이트 키퍼'로 지정해 규제하는 법이다. 게이트 키퍼로 지정된 기업은 자사의 서비스를 경쟁업체에도 개방해야 한다. 애플은 이 법의 주요 타겟으로 거론된다. 이에 애플은 지난 5일 'iOS 17.4' 업데이트를 정식 출시하며 유럽 지역에 한해 자사 앱스토어 외에 타사 앱마켓을 통해 앱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도록 '사이드로딩'을 허용하며 몸을 낮췄다. 그간 한 번도 내준적 없던 iOS 외벽이 처음 열린 것이다.
허나 애플은 개발자 계정을 해지해 에픽게임즈의 입성을 저지했다. 에픽게임즈 측은 "다른 개발자들에게 애플과 경쟁하려고 하거나 불공정 관행에 비판적일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고 있다"며 "애플이 단독 재량으로 타사 마켓플레이스를 iOS에서 쫓아낼 수 있는 권한을 유지한다면, 언제든 합리적인 개발자는 타사 앱 스토어를 이용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동지에서 적으로...신의를 잃은 애플
앞서 애플은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로부터 음원 스트리밍 시장에서 지배력을 남용했다는 이유로 무려 18억4000만유로(약 2조7000억원)에 달하는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이는 스포티파이가 2019년 애플이 자사의 서비스인 '애플뮤직'과 공정하게 경쟁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불만을 제기한 데 따른 조처다.
에픽게임즈와 스포티파이는 애플의 정책을 비판하는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처음부터 애플에 등을 돌린 건 아니었다. 이들은 앱스토어 생태계가 자리잡기 시작한 초기부터 애플과 오랜 기간 협업해 온 파트너였다. 애플은 이들로부터 우수한 앱과 서비스를 제공받아 iOS 생태계를 키울 수 있었고, 개발사들은 모바일이라는 새로운 성장 무대를 제공 받았다. 이상적인 '상부상조'였다.
허나 모바일 시장이 충분히 자리잡기 시작한 이후부터 30%에 달하는 앱스토어 수수료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개발사들은 타사 앱 마켓이나 인앱 결제 방식을 요구했으나, 애플은 보안 등을 이유로 폐쇄적인 생태계를 고집했다. 개발사들은 이미 압도적 시장 지위를 차지한 애플의 정책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애플이 '애플뮤직', '애플 아케이드' 등 자사 서비스 사업을 키우며 '심판이자 선수'로 등판하자 결국 '불공정'이란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개발사들 사이에선 함께 생태계를 키워왔으나 정작 과실은 애플이 갈취한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애플은 앱스토어를 통해 매년 매년 1조달러(약 1330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애플뮤직, 애플 아케이드 등이 포함된 서비스 부문 매출 역시 매 분기 사상 최대치를 경신해왔다.
'독이 든 사과'가 된 폐쇄적 생태계
이처럼 애플에 달콤한 과실을 안겨주던 폐쇄적인 '애플 왕국'은 결국 적으로 둘러 싸인 형국에 놓였다. 각 국 정부는 애플에 반독점 칼날을 들이대기 시작하면서 애플 생태계의 폐쇄성은 '독이 든 사과'로 변하고 있다. EU 뿐만 아니라 한국, 미국, 영국, 일본, 호주 등에서도 애플의 반독점 문제를 들여다보고 있다. 미국 법무부는 올 상반기 애플을 반독점 위반 혐의로 기소할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애플 왕국이 결국 분열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더 큰 문제는 애플의 폐쇄성이 혁신의 속도를 느리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함께 왕국을 키워왔으나, 결국 소작농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앱 개발사들은 애플에 등을 돌리고 있다. 애플이 최근 출시한 '비전 프로'에 구글, 메타, 넷플릭스 등의 기업들이 전용 앱을 내놓을 계획이 없다고 밝힌 게 상징적인 사례다. 더 이상 애플이 만든 생태계를 믿지 않게 된 것이다. 결국 비전 프로는 3499달러(약 460만원)라는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쓸만한 앱이 없다는 혹평을 들어야만 했다.
애플이 홀로 비전 프로를 붙잡고 고전하고 있는 동안, 애플 생태계에 대한 매력도는 계속 하락하고 있다. 그동안 애플 제품에 높은 충성도를 보여온 중국 소비자들이 등을 돌리면서, 2024년 첫 6주 동안 중국 내 아이폰 판매량이 24% 하락했다는 시장조사업체 조사 결과가 나왔다. 애플은 자존심을 굽히고 할인 공세까지 나섰으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더 이상 중국 소비자마저 아이폰이 가격 외적으로도 화웨이, 오포, 비보, 샤오미 같은 현지 제조사 제품보다 특별히 매력적으로 느끼지 않게 됐다는 신호다.
AI 시대 못 따라가는 애플
자신이 만든 성에 스스로 갇혀버린 애플은 결국 시대 흐름에서 뒤처지고 있다. 애플카는 좌초됐고, 폴더블 아이폰, 애플링과 같은 새로운 혁신 제품은 아직 걸음마도 못 뗀 단계다. 특히 모바일 이후 가장 큰 패러다임 변화인 생성형 AI 시대에 제 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치명타다. 애플은 시총 1위 자리를 '챗GPT' 개발사 오픈AI와 손잡은 마이크로소프트에 내준데 이어, AI 붐의 최대 수혜주로 꼽히는 엔비디아에 바짝 추격당하는 샌드위치 신세가 됐다.
이런 가운데 삼성전자 '갤럭시 S24 울트라'가 미국 유력 소비자 전문지 컨슈머리포트의 최신 스마트폰 평가에서 애플 '아이폰 15 프로 맥스'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이폰의 안방인 북미시장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은 것이다. 컨슈머리포트 측은 갤럭시 S24 울트라의 '실시간 통역', '서클 투 서치', 'AI 편집' 등 '갤럭시 AI'를 가장 매력적인 기능으로 꼽으며 "갤럭시 AI는 실용적이며 상당히 인상적"이라고 평가했다.
삼성이 애플을 제치고 'AI 폰' 분야에서 치고 나갈 수 있었던 비결은 '개방형 협업'에 있다. 삼성은 내부적으로 자체 생성형 AI 모델 '가우스'를 개발하는 한편, 구글과 손잡고 최신 멀티모달 AI 모델 '제미나이'를 탑재했다. 검색에 새로운 차원을 보여준 '서클 투 서치' 기능도 안드로이드 제품 중 가장 먼저 적용하며 호평을 이끌었다. 현재 생성형 AI 시대를 이끌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등은 언제든 삼성과 협업할 수 있는 든든한 우군이다.
삼성은 스마트폰 시장에서 구글 '픽셀'의 경쟁자다. 퀄컴 '스냅드래곤'과 삼성 '엑시노스'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시장에서 경쟁한다. 하지만 삼성과 구글, 퀄컴은 함께 손잡고 차세대 확장현실(XR) 플랫폼 구축에 나섰다. 서로 경쟁할 땐 경쟁하되, 협업할 부분은 기꺼이 손을 잡는 성전자의 개방성과 상호 신뢰가 만든 성과다. 이런 개방형 협업은 삼성의 혁신 속도를 높이고 있으며, 애플의 폐쇄성과 대비되는 새로운 경쟁력으로 부각되고 있다.
AI 시대 빛을 발한 '개방형 협업'
"기술은 우리의 일상을 계속해서 새롭게 변화시켜 왔습니다. 또한 개인에 최적화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업계의 협력은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빠른 변혁의 시대에, 저는 개방형 생태계(Open Ecosystem)만이 사용자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자유롭게 맞는 경험을 창조할 수 있고, 혁신을 더욱 가속화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2021년, 노태문 삼성전자 MX사업부장(사장)이 삼성전자 뉴스룸에 올린 '스마트폰 혁신의 미래를 펼치다' 기고문 중 일부다. 그동안 삼성전자는 폴더블폰, 스마트워치, AI 스마트폰, AI 노트북 등 다양한 혁신 제품을 내놓으면서 항상 빠지지 않고 개방형 생태계와 협업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애플이 폐쇄적인 생태계로 홀로 막대한 이익을 올리는 동안, 삼성전자는 개방형 생태계를 통해 업계 신뢰를 쌓으며 폭넓은 우군을 확보해왔다.
모바일 시대, 애플은 '적의'을 쌓고 삼성은 '동지'를 키웠다. 이제 삼성의 철학이 빛을 발할 시간이 오고 있다. AI 시대는 어떤 빅테크도 홀로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패러다임 변화다. 사용자를 자신의 생태계 안에 가두는 모바일 시대 플랫폼 전략으로는 더 이상 생존이 어렵다는 걸 현재 애플의 위기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반면 협업의 가치는 새로운 AI 시대 삼성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주고 있다.
최근 MWC 2024 행사에서 '갤럭시 링'을 선보인 박헌수 MX사업부 디지털 헬스팀장은 "모바일 제품은 AI 기술의 주요 접점"이라며 "삼성전자는 폭넓은 제품 포트폴리오와 혁신, 개방형 협업 철학을 바탕으로 AI 기술의 전세계적 확장을 가속화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삼성은 사용자의 손 끝에서 AI 기술을 만질 수 있는 '접점'을 발빠르게 확보해가고 있다.
삼성은 사용자를 둘러싼 모든 기기가 원활히 연결되는 '초연결'을 기반으로 AI를 통해 사용자 맞춤형으로 작동하는 거대한 생태계를 꿈꿔왔다. 반도체, 스마트폰, TV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선두권을 유지하면서도 독주하지 않고 협업의 가치를 존중해 온 삼성전자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다. 이제 이 그림을 제대로 펼칠 AI 시대라는 광활한 캔버스가 눈 앞에 놓였다.
남도영 기자 hyun@tech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