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연구하는 학회가 지난달 23일 창립총회를 열고 공식 출범했다. '디그라(DiGRA; Digital Games Research Association)'라는 이름을 통해서다. 국제디지털게임연구학회를 뜻하는 디그라는 전세계 17개 지회(헤드쿼터 포함)가 있다. 한국지회는 이에 더해 18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윤태진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교수(게임과학연구원장)가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그를 포함한 발기인은 33인에 이른다.
한국지회는 학계, 산업계, 법조계 등 다양한 인적 구성이 돋보인다. 연령대도 다양하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50여일 앞두고 출범 소식을 알렸다. 게임을 둘러싼 규제는 강해지고 개발사들은 불황을 호소할 때 새로운 학회가 등장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옛말처럼 한국지회의 탄생에 기대와 우려 섞인 외부 시선도 존재했다. 하지만 이 모든 맥락과 무관하게 학자적 반성과 갈증을 등에 업고 학회는 올해 태동했다.
"2005년에 쓴 논문 말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만약 20년이 지났는데 우리나라 게임연구에 여전히 진전이 없다면 문화에 관심 있는 학자들의 직무유기일 것이라고. 그런데 올해로 20년이 다 됐고, 현실은 그대로더라. 그때부터 우리가 열심히 했었더라면 게임연구 분야뿐 아니라 산업계를 포함한 다방면에 보다 진전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게임산업의 발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게임업계야말로 시대 흐름에 잘 적응하고 노하우와 지식을 축적해온 분야로 꼽힌다.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는 메타버스가 업계에서는 이미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이슈라는 점이 대표적이다. 다만 이 같은 업계의 특성을 살려 선도적으로 고민했던 담론들을 학술적으로 축적할 수 있었다면 상황은 어떤 방식으로든 달라졌을지 모른다.
한국지회는 두 가지 지향점을 띤다. 게임을 좋아하고 연구에 관심을 가진 후속 세대를 지속적으로 길러내는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다. 20년 전 아쉬움이 반복되지 않도록 많은 한국 게임학자들이 논쟁을 벌이고 연구하는 미래를 그린다. 학술적 국제 교류도 동반한다. 독립 단체로서 또 18번째 지회로서 세계 각국과 교류를 이어간다. 당장 올해 가을부터 동아시아권 협력 행사를 추진할 계획이다.
게임에 대한 인식 변화도 과제다. 국내 유명 게임사에 취업한 사례가 유사한 규모의 다른 업종 사례만큼 좋은 사회적 인식을 얻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게임은 우리 사회에서 한때 중독을 유발하는 해악처럼 여겨졌고, 병리적 현상과 함께 공론장에 오르기도 했다. 먼 옛날 사회의 하위문화로 여기던 영화나 방송,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한류를 타고 그 이미지를 탈피해온 것처럼 게임에 대한 인식 제고 필요성도 높아지고 있다.
"게임을 연구하는 사람이 산업에 기여할 가장 장기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게임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라고 봤다. 게임이 진지한 학문적 연구 대상이 된다는 것을, 학회를 만들어 학술지를 내고 학과도 늘어나면서 이런 부분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면 사람들이 게임을 쓸 데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한국지회는 한국게임연구의 정상화를 설립 취지로 꼽았다. 국내 게임산업 규모나 이용자 규모, 역사적 의미나 문화적 유산 등을 고려할 때 한국지회가 생긴다면 그 순서는 3번째 안팎이 됐어야 한다는 게 윤태진 초대 회장의 설명이다. 다른 나라 사례에 비춰 국내 학술 연구의 본격적인 움직임은 다소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속도를 맞춰갈 생각이다.
게임연구학회로서 세계에서 가장 큰 단체로 꼽히는 디그라는 학회의 성격을 결정짓는 연구 범위도 광범위하다. 인문사회, 법률, 정책, 미디어 이코노믹스, 이용자 문화 등 전문적으로 게임을 다뤄갈 방침이다. 방법도 다양하게 고민 중이다. 학술지 등재를 통한 전문적인 접근도 좋고, 대중적인 말과 글의 전파도 나쁘지 않다. 관련해 국제 세미나를 열고, 격월로 열리는 스터디 그룹 운영도 고려 중이다.
"학회로 출범하지만 게임연구회 특성상 재야 게임학자나 비평가가 많고, 학계에 거리를 두는 분들도 있다. 이런 분들과 함께 젊은 분들이 주축이 된 모임 자리를 만들려고 노력 중이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최소 두 달에 한 번씩 모여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담론을 공유하도록 빠른 시일 내 관련 작업을 시작하려 한다."
다방면의 활동을 계획 중인 한국지회는 조금 다른 행보를 예고했다. 특정 분야에 편중되지 않도록 외부 자본 의존도를 줄이면서 다양한 창구를 활용하겠다는 계획이다. 유럽연합에서 지원하는 연구기금처럼 해외 연구사업을 지원하는 각종 펀딩을 받는 식이다. 또 기업의 후원을 받더라도 이해에 따른 특정 이슈 파이팅을 지원하기보다 출판지원금 명목 등의 자금 운용에 나설 예정이다.
오는 12일에는 출범 이후 첫 집행부 회의가 예정돼 있다. 앞서 언급한 고민들을 8명의 운영진과 공유하는 자리가 열린다. 사단법인 등록을 위한 절차 외에도 구체적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론적 고민이 필요하다. 3년 뒤에는 18개 지회를 아우르는 디그라 세계 총회도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를 위한 초석 다지기가 당장의 장기적인 목표가 될 전망이다.
"이상한 사람들이 이상한 일을 하는 것이기도 한데, 다소 직설적인 얘기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학술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하거나 학문적 전통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철학적 목표를 바탕으로 활동하는 게 아니다. 다만 지회 출범에 동참해준 많은 분들이 실망하는 일 없도록 취지에 맞게 디그라 한국지회를 운영해나가겠다."
임경호 기자 lim@tech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