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e스포츠 리그가 흥행하는데 가장 필요한 요소는 바로 '스타'입니다. 그리고 리그가 오랫동안 사랑 받기 위해서는 '신예 스타'가 계속 탄생해야 하죠. 새로운 얼굴이 자꾸 등장해야 리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FC온라인 리그는 운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곽준혁 이후 새로운 스타가 눈에 띄지 않는 상황이라 아쉬움이 컸죠. 성적이 좋은 선수는 있었지만 스타성을 갖춘 프로게이머가 거의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최근 진행된 2024년 eK리그 챔피언십 시즌2에서 특급 신예가 탄생했습니다. 잘생긴 외모만 눈에 띄는 것이 아닙니다. 역경을 딛고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이야기거리'를 탄생시키는 재주도 가졌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WH게이밍 이원주입니다.


이원주가 써내려간 '특급신예' 스토리

한 팀이 등장합니다. 승강전을 통해 이번 시즌 첫 본선에 오른 팀이었죠. 팀 에이스 역할을 하는 선수가 김선우라는 점만 알려졌을 뿐, 베일에 쌓인 팀이었습니다. 게다가 주목도도 낮았습니다. 지금까지 승격팀 가운데 첫 시즌부터 좋은 성적을 기록한 사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WH게이밍은 이번 시즌 내로라 하는 팀을 모두 꺾고 준우승을 기록했습니다. 놀라운 결과입니다. 지금까지 승격팀 가운데 최고의 성적입니다. 게다가 최강 KT 롤스터를 에이스결정전까지 몰아 붙이는 패기까지 보여줬습니다.

그 중심에 있는 선수는 바로 '스타' 이원주였습니다. 이원주는 개인전에서 3위를 기록한데 이어 팀을 플레이오프까지 올려놓으면서 주목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 소위 '미친 활약'으로 팀을 준우승까지 올려 놓으며 이번 시즌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죠.

이원주는 결승전 에이스 결정전에서 곽준혁에게 패하기 전까지 6전 전승을 기록했습니다. 젠지와의 경기에서는 2대2 경기에 나서 승리했고 개인전에서도 승수를 보탰죠. 광동전에서도 단체전, 개인전 모두 승리한데다 에이스 결정전에서 이기면서 팀을 결승에 올려 놓는 괴력을 발휘했습니다. 


이원주는 에이스가 아니었다?

사실 이원주는 WH게이밍의 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 선수들의 실력이 비슷하긴 했지만 WH게이밍은 김선우가 에이스 역할을 해왔다고 합니다. 경기를 할 때 가장 떨지 않고 배포가 두둑한 선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끝난 시점에서 WH게이밍의 에이스는 누가 뭐래도 이원주입니다. 실제로 모든 에이스 결정전에 이원주가 출격했고, 동료들도 이제는 에이스 결정전이 오면 알아서 이원주를 쳐다본다고 하네요.

/사진=이소라 기자
/사진=이소라 기자

"어쩌다 보니 에이스 역할을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어요(웃음). 매번 첫 타자로 나갔던 것은 빨리 경기를 끝내고 마음 편하게 남은 경기를 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거든요. 사실 지금도 제가 굳건한 에이스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우리팀 선수들 모두 실력이 정말 좋거든요."

대부분의 선수들이 이원주와 실력이 비슷하다고 하니 다음 시즌 WH게이밍의 활약이 더욱 기대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선수들도 이원주처럼 각성한다면 WH게이밍은 더욱 무서운 팀이 될테니까요.


사실은, 늦깎이 신예인 이원주

외모만 보면 앳되 보였기 때문일까요. 인터뷰 내내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이원주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스타크래프트 리그도 자주 봤다고 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나이를 물어보고 나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원주는 1996년생, 내년이면 서른이 되는 꽤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프로게이머를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제 나이를 들으면 다들 깜짝 놀라더라고요. 아저씨라고 지칭할만 하죠? 물론 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형들도 있지만, 신예팀 소속 선수 치고는 나이가 적지 않다보니 다양한 고민들이 있어요.

어렸을 때라면 패기로 밀어 붙였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거든요. 지금 큰 관심을 받고 있지만 이마저도 언제 사그라들지 모른다는 생각이 있어 절대 자만하지 않아요. 모든 것이 거품이 되지 않도록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주목을 받으면 흔히 말하는 '연예인병'에 걸리는 선수도 많은데, 이원주는 오히려 관심을 경계하고 스스로를 계속 채찍질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역시 나이가 주는 신중함이 느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롤모델 김정민에게 '들이'대다

한없이 수줍어하고, 언변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이 선수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는 참 무게가 큰 느낌이었습니다. 허세도, 자만심도, 허영도 없는 이원주의 화법은 그의 연륜(?)을 느끼게 만들었죠.

그런 이원주가 눈을 반짝이는 순간이 있었다면 바로 '김정민'에 대한 에피소드를 언급했을 때였는데요. 존경하는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누구보다 즐거운 모습이었습니다. 

/사진=이소라 기자
/사진=이소라 기자

"개인적으로는 김정민 선수를 좋아해요. 나이가 있어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레전드'니까요. 늦은 나이에 프로게이머를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준 선수기도 해요.

사실 얼마 전 친하지도 않은 김정민 선수에게 들이댄 적이 있어요. 연습실에서와 대회장에서의 '핑(네트워크 때문에 선수 움직임이 미세하게 지연되는 것)'이 너무 달라 고민에 빠졌거든요. 

혼자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문득 게임 내에서만 친구 추가가 돼있는 김정민 선수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어요. 친분도 없는 상태에서 그냥 들이댄건데 많은 것들을 알려주시더라고요. 정말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평소에는 말도 없는 내향적인 성격의 이원주지만, 경기를 위해서라면 누구보다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모습에서 천상 프로게이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침착함과 적극성이라면 앞으로도 대성할 수 있겠다는 느낌입니다.


"가늘고 길게 가고 싶어요."

이원주는 자신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선수입니다. 리그 초반, 긴장을 너무 많이 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이태경에게 무기력하게 패한 뒤 팀에 출전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당시 제가 이 상태로라면 어떤 선수를 만나도 무기력하게 패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동료들에게 '시간을 달라'고 이야기했죠. 이태경 선수와의 경기를 무한반복해 보면서 제 약점을 파악하고 공격 타이밍을 고민했어요.

다행히 제 선택이 맞아 떨어졌고 연습실에서 승률이 다시 올라가더라고요. 동료들이 시간을 준 덕분에 제 컨디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어떤 선수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이원주는 한참 고민하다가 "가늘고 길게 가는 선수"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이번 시즌 활약이 너무 굵어서 가늘게 갈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그는 꾸준하게 오래 프로게이머를 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 선수였습니다.

/사진=이소라 기자
/사진=이소라 기자

"김정민 선수가 이미 30대 후반에도 충분히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잖아요. 저 역시 오랫동안 리그에서 살아남는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당장 '레전드'가 되겠다는 원대한 목표 보다는 동료들과 잘 융합해 항상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팀이 될 수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소라 기자 sora@tech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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