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은 깨라고 있는거야.' 풍자와 해학의 문화를 지닌 우리나라에서 약속의 중요성을 역설한 문장이다. 우스갯소리처럼 보이면서도 뼈가 있는 이 문장을 실천한 건 다름 아닌 글로벌 빅테크 그룹 구글이다.
정부의 고정밀 지도 데이터 반출 결정이 또 한번 연기됐다. 이유는 '구글의 대외적 의사표명과 신청서류 간 불일치'다. 지난 9월 구글이 정부의 입장을 일부 받아들여 영상 보안처리 및 좌표 표시 제한에 대해 수용 의사를 밝힌 것도 잠시 신청서에는 해당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 결정에 대한 원인 제공은 구글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도 과연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명확하게 '그렇다'고 답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한미 협상 문제도 무시할 수 없지만, 누군가는 눈독들일 수 있을 여지를 활짝 열어놓았다는 것도 짚고 넘어갈 부분이다. 지난 2007년부터 2016년, 2025년에 이르기까지 약 20년 가까이 구글이 우리나라 지도 데이터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기도 하다.
약속을 어긴 기업에 기회를 주는 정부의 눈치 보기 속에서, 데이터 주권은 점점 늪으로 빠지고 있다. 이제 더이상 공간정보는 단순한 기술적 문제로 바라볼 수 없다. 교통과 재난, 디지털 시티, 안보, 국방력 등 다양한 영역의 기반이 되는 핵심 데이터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지켜내야 하지만 공간정보는 여전히 위험에 노출돼 있다.
결단 부족과 미흡한 대응이 큰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사례를 만들기 전 국가 전략과 주권을 지키기 위한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 단순한 관망과 미루기는 더이상 선택지가 될 수 없다. 우선, 전문가들은 해외 기업들이 지도 데이터 반출을 요구하는 행정 규칙인 국외반출 허가심사 운영 규정부터 손질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여 이야기 한다. 현행 규칙의 경우 종이 지도를 가지고 다니던 시절 만들어진 그야말로 캐캐묵은 규정이다. 자가용에 내비게이션 대신 커다란 종이지도가 있던 그 시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나라 공간정보 기업의 기술력과 방한 외국인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다는 것이다. 구글은 방한 외국인을 위해 고정밀 지도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네이버나 카카오 등도 이들의 편의를 위해 꾸준히 외국인 전용 기능을 도입하고 캠페인을 이어가며 공백을 메우고 있다.
우선 네이버는 이번 APEC 기간 동안 경주에서 우리 고유의 문화를 알리고, 편리한 관광까지 할 수 있도록 '비로컬위크'를 진행하며 외국인의 편의성을 도모했다. 카카오 또한 방한 외국인에게 필요한 서비스인 카카오맵과 카카오톡, 케이라이드를 연계한 '트래블 팩' 캠페인을 기획해 즐거운 여행이 되도록 했다. 트래블 팩은 인천공항 터미널, 공항철도, 명동·청계천·서울역 등 여행객 이동량이 많거나 랜드마크 중심으로 옥외광고를 진행하는 만큼 외국인도 이를 쉽게 발견해 카카오맵을 활용할 수 있다.
정부는 정책 정비에서 더 나아가 토종 지도 플랫폼의 기술력 및 기획력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민관 협력을 통해 국내 공간정보 산업을 활성화할 수 있다. 이 차원에서 국토지리정보원이 공간정보 기반 기술을 고도화하고 생활밀착형 서비스를 개발하기 위해 네이버와 손을 잡은 것은 의미 있는 첫걸음이다.
데이터 주권을 지키는 일은 늦출수록 위험이 커진다. 이번 기회조차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된다. 구글의 요청을 두고 눈치만 보는 동안, 우리의 데이터는 늪 속으로 천천히 빠져 들어가고 있다. 이제는 결단의 시간이다. 더 이상 연기는 없다.
배수현 기자 hyeon2378@tech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