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의 두뇌에 들어가는 CPU에 '반도체'가 쓰인다는 것. 지금은 상식 중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반도체가 아닌 '원자'를 기억소자로 해서 슈퍼컴퓨터를 뛰어 넘는 미래의 컴퓨터, 양자컴퓨터에 대한 얘기가 많이 들리고 있습니다. 양자컴퓨터 도대체 무엇이고 왜 필요한 걸까요?
'비트' 대신 '큐비트' 쓰는 양자컴퓨터... 슈퍼컴퓨터 1600대 이긴다
컴퓨터는 들어봤는데 양자컴퓨터는 또 뭐냐고요? 저 같은 문과들 뿐 아니라 스티븐 호킹 선생님도 양자역학 얘기를 하는 것을 들으면 총을 꺼내고 싶다고 하셨을 정도로 어려운 바로 그 양자역학을 활용한 컴퓨터입니다. 우리가 지금 쓰는 컴퓨터에서 자료의 양은 비트로 측정이 됩니다. 0 아니면 1 이렇게 두 개의 명확한 상태로 인코딩이 되죠. 2개의 큐비트라면 4개의 상태 00,01,10,11이 나올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양자컴퓨터에서 쓰는 계산법은 좀 다릅니다. 0일수도 있고 1일수도 있고 둘 다 일 수도 있고 이런 '상태의 중첩', 문과적으로는 '애매모호함'으로 표현할 수 있는 양자 비트, 또는 큐비트를 사용합니다. 참고로 중첩이 뭔지 잠깐 설명을 드리면요. 양자역학에 따르면 원자보다 작은 물질은 파동과 입자의 두 가지 성질을 가질 수 있고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죠. 이걸 중첩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귀신이 내 앞에 있다가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고 때로는 나도 뚫고 지나가는 것처럼 재빠르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큐비트는 기존 4개의 조합이 아닌 16가지 조합을 동시에 구현 가능하다 보니 20개의 큐비트가 있으면 2의 20승, 104만 8576개의 정보를 동시에 저장할 수 있습니다.
큐비트가 300개만 있어도 2의 300제곱이라는 우주의 모든 원자수보다 많은 상태가 가능하고요. 50큐비트만 있어도 슈퍼컴퓨터를 뛰어넘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빠르냐면요! 병렬로 연결된 1600대의 슈퍼컴퓨터를 사용해 8개월이 걸리는 129자리 숫자 소인수분해를 단 몇 시간만에 해결하고요. 56비트로 되어있는 비밀 암호를 무작위로 찾아낼 때 기존의 컴퓨터로는 1000년이 걸리지만 양자컴퓨터로는 4분이 걸린다고 하고요.
리처드 파인만에서 시작해 구글까지... 양자컴퓨터 개발 역사
양자컴퓨터라는 개념을 처음 이야기한 분은 1965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선생님입니다. 본격적으로 연구된 건 1985년 IBM에서였죠. 1997년 IBM이 2비트 양자컴퓨터를 만들었고 1999년 일본 NEC사가 양자컴퓨터 고체 회로 소자 개발에 세계 최초로 성공했죠. 2012년에는 양자 컴퓨터의 기초를 쌓아올린 프랑스의 세르주 아로슈 박사와 미국의 데이비드 와인랜드 박사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레이저와 마이크로파를 사용해 양자 상태를 파괴하지 않고 관찰하고 조작하는 방법을 개발했는데요. 와인랜드 박사의 기술을 응용한 시계는 세슘 원자 시계의 100배나 정확하다고 해요. 약 137억 년 전 우주 탄생순간부터 지금까지 오차가 5초 차이밖에 안난다고 합니다. 아로슈 박사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을 실제로 구현했는데요. 고양이 대신 광자를 한 곳에 가둬 놓고 도넛 모양의 원자를 집어넣어 광자의 상태에 변화를 주었더니 광자와 원자 사이에 중첩 상태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연구는 꾸준히 진행되어 왔지만 2017년 까지만 해도 기술의 한계로 시장 규모가 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2018년 구글, IBM, 인텔 등이 각각 수십 큐비트 양자 프로세서를 꺼내놓으면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2019년 구글은 양자 프로세서 칩 '시카모어'를 공개하며, 53개의 큐비트를 이용해 현존하는 최고 성능의 수퍼 컴퓨터를 압도하는 '양자우위'를 달성했다고 발표해버립니다.
날씨예측에서 질병치료까지... 무궁무진 '양자컴퓨터' 활용도
여기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죠. 정보 처리량과 속도가 그냥 엄청나게 뛰어나다는 건 알겠는데 우리랑 무슨 관련이 있냐고요?
아~날씨 왜 이렇게 만날 틀려!! 기상청을 원망하시던 분들도 양자컴퓨터라면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한치의 오차도 있으면 안되는 로켓발사나 암호해독, VR, AR 등 비디오 게임에 적용되면 정말 현실이랑 똑같은 가상현실 체험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질병치료에도 활용가능해요. 실제로 스탠포드의 FAH 프로젝트는 양자 컴퓨터를 활용해 단백질의 접힘 오류와 관련한 질병으로 알려진 알츠하이머, 광우병 등 다양한 형태의 암 치료를 위해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분석하고 있고요. 하버드 대학은 2012년 양자컴퓨터를 활용해 6개 아미노산 격자 단백질 모델의 기저 상태를 발견하면서 양자컴퓨터를 활용한 최초의 자연과학 최적화 문제의 사례라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양자컴퓨터 투자금 쏟아붓는 미국과 유럽... 국내에선 'SK텔레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전세계 정부와 기업들은 양자 암호통신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습니다. 유럽 연합은 10억 유로, 1조 3000억을 쏟아 붓고 있고 미국도 12억 달러, 비슷하게 1조 대를 투자하고 있죠.
국내 기업 중에선 SK 텔레콤이 양자 기술에 가장 앞서가고 있습니다. 5G 시대 본격 개막으로 데이터 전송이 어마어마 해지니 양자 암호통신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죠. 송신부와 수신부에서 양자 암호키를 동시에 생성하는 양자 키 분배기, 양자 특성을 이용해서 패턴이 없는 암호를 만드는 기술인 양자 난수 생성기 부문에서 글로벌 최고의 기술력을 보이고 있는데요. 지금 보안 시스템은 일정한 패턴이 있어 슈퍼컴퓨터만 갖고 있어도 바로 뚫리는데 양자 난수 생성 기술로는 공인인증서, OTP 같은 사물인터넷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답니다.
투자 없이는 결과도 없었겠죠? 국내 대기업 최초로 2011년 양자기술연구소를 설립했고 지난해에는 스위스 양자정보통신기술기업 IDQ에 700억을 투자하기도 했습니다. 올해는 SK텔레콤이 제안한 양자 키 분배 적용 네트워크의 필요 보안사항 관련 기술이 국제 표준으로 채택되기도 했습니다.
뭐든지 완벽한 건 없죠. 문제도 있습니다. 일단 양자정보 처리 저장 중에 노이즈나 에러가 발생할 수 있는데 여기에 매우 취약하다고 하네요. 처리량이 많은 만큼 에러가 나면 그 또한 대 혼란을 야기하겠죠? 보안에 오히려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양자컴퓨터를 갖고 있다면 어떤 비밀번호도 뚫어 버릴테니까요!
해커의 손에 양자컴퓨터가 들어간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죠. 오죽하면 아서 허먼 미국 허드슨 연구소 연구원은 "양자컴퓨터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연산능력으로 사이버상의 암호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미래 핵무기"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양자기술 시장조사 분석업체 인사이드 퀀텀 테크놀로지는 양자컴퓨터 시장 규모가 2025년 7억8000만달러에서 2029년 26억달러까지 성장할 걸로 내다봤습니다. 클라우드,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등 모든 분야에서 양자컴퓨터 활용도가 크게 증가할걸로 기대되는데요. 어쩌면 반도체의 시작이 미미했지만 세계 최고의 기술로 자리 잡았듯 양자컴퓨터도 그런 기술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가야할 길은 멀겠지만요.
신지은 기자 sophie@techm.kr/김보경 에디터 clara@tech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