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가 흥행하고 재미있으려면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단순한 승패만 있다면 리그를 보는 재미가 떨어질 것입니다. 선수 사이에, 팀 사이에, 그리고 선수에게 어떤 이야기가 붙게 되면 리그를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습니다.

카트라이더 리그에서 카트라이더 드리프트 리그(KDL)로 바뀌면서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부재에 대한 고민이 생겼을 것 같습니다. '레전드' 유영혁과 개인전 우승자 김승태가 군문제로 리그 참여가 어려웠고, 최정상 선수인 박인수마저 군대에 입대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이제 KDL은 새로운 선수, 새로운 이야기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이재혁과 박인수라는 투톱 라이벌 체제가 무너졌고, 광동 프릭스(광동)과 리브 샌드박스(샌드박스)라는 최강 팀 라이벌 관계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위기 상황에 등장한 한종문

리그가 위기일 때 새로운 구원 투수가 등장해주지 않으면, 리그 생명은 짧아집니다.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은 새로운 스타가 발굴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KDL은 프리시즌1을 통해 새로운 스타가 생겨났습니다. 바로 한종문입니다. 만약 한종문이 없었다면, KDL은 고인물로 가득한 그저그런 리그로 전락했지도 모릅니다.

한종문은 모바일 기반 게임 카트라이더 러쉬플러스 리그(KRPL)에서 팀전-개인전 동반 우승, 팀전 3연속 우승 등 다양한 기록을 세운 '레전드'였습니다. 그는 모든 영광을 뒤로하고 플랫폼 변경까지 감수하며 새로운 리그에 도전합니다. 

성남 락스 한종문/사진=이소라 기자
성남 락스 한종문/사진=이소라 기자

사실 그의 도전은 무모해 보였고, 성공이 보장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통상 모바일과 PC는 조작 방법이 아예 다르기 때문에 잘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죠. 

하지만 그는 프리시즌1에서 완전 처음보는 선수들로 구성된 신예들을 이끌고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았습니다. 한종문이 속한 성남 락스(락스)는 한종문의 에이스 결정전 5연승 덕에 5승을 확보, 최종 순위 4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하지만, 프리시즌2가 위기였다

특급 신예에서 '레전드'로 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2회차입니다. 신인상을 받은 신예들이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경우를 우리는 스포츠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한종문이 프리시즌1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프리시즌2는 다양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우선 드리프트 팀전은 혼자 잘한다고 해서 최고의 팀이 되기 어렵습니다. 팀전은 완벽한 팀워크가 바탕이 돼야 하기 때문에 한종문 혼자 이끄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프리시즌1에서 에이스 결정전 5연승을 달렸지만, 한종문이 평생 에이스 결정전에서 승리하리라는 보장이 없죠. 락스 선수들의 경기력이 올라오지 못하면 한종문 역시 함께 추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에이스 결정전 5연승은 양날의 검인 기록입니다. 만약 프리시즌2에서 패배를 하게 되면 급격하게 분위기가 내려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박인수 역시 에이스 결정전에서 연승가도를 달리다가 한번의 패배 이후 지속적인 에이스 결정전 부진을 겪었으니까요.


포지션 변경, 고민 깊을 수밖에 없었던 한종문

무엇보다 한종문은 프리시즌2를 앞두고 포지션 변경이라는, 어려운 미션을 받았습니다. 항상 팀에서 러너 역할을 해왔던 한종문은, 이번 시즌부터는 스위퍼로 활약해야 했습니다. 사실 스위퍼는 팀전에서는 희생해야 하는 위치입니다. 러너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몰리지만, 사실 팀전 스피드전에서는 스위퍼의 활약 여부에 따라 승패가 갈립니다. 스위퍼는 주목 받지는 못하지만, 경기 내에서 온갖 궂은 일을 해야 하는 위치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위퍼는 팀에서 경험이 많고 실력이 좋은 선수가 맡아야 합니다. 즉 실력이 뛰어난 선수가 해야 하는 포지션입니다. 락스에서는 한종문 이외에는 스위퍼 역할을 잘 해낼 선수가 딱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프리시즌1에서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던 한종문이, 희생이 필요한 포지션으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게다가 이번 시즌부터 팀에 합류한 이명재가 에이스 결정전까지 출전해 승리를 따내면서 한종문은 자신의 위치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명재는 개인전에서도 승승장구 했고, 본인은 16강 패자조로 떨어지면서 자칫 슬럼프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실수, 그리고 따라준 운

그의 방황은, 경기에서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내로라 하는 선수들을 에이스 결정전에서 모두 격파했던 한종문은 아마추어팀 세라픽과의 에이스 결정전에서 막판에 실수를 범합니다. 

/사진=중계화면
/사진=중계화면

마지막 코너에서 한종문은 상대에게 추격을 허용했습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였습니다. 빌드가 꼬이면서 인코스를 내주며 역전이 쉽지 않은 거리에서 추월당한 것입니다. 

상대(왼쪽)은 부스터를 쓰지 않았고 한종문은 부스터를 쓰고 결승전을 통과했다. 확인해본 결과 상대도 부스터가 있었지만 실수로 사용하지 못했다. 만약 상대가 부스터를 사용했다면 한종문은 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사진=중계화면
상대(왼쪽)은 부스터를 쓰지 않았고 한종문은 부스터를 쓰고 결승전을 통과했다. 확인해본 결과 상대도 부스터가 있었지만 실수로 사용하지 못했다. 만약 상대가 부스터를 사용했다면 한종문은 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사진=중계화면

하지만 하늘이 한종문을 도왔습니다. 상대가 부스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스터를 사용하지 못했고, 한종문은 상대적으로 부스터를 사용해 막판 역전에 성공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0.034초의 명승부가 펼쳐졌습니다. 한종문은 이 경기를 두고 "승리를 당한 것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하늘이 도운 경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이 경기에서 패했다면 한종문은 치명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미 개인전에서 패자전으로 떨어지며 자신감이 하락한 상황에서, 강팀도 아닌 아마추어 팀에게 자신의 실수로 에이스 결정전에서 패했다는 사실은 신예가 극복하기는 어려운 시련이었을 테니까요.

말 그대로 '승리를 당한' 한종문. 온 우주가 한종문이라는 스타 탄생을 바라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제 한종문은, 하늘의 부름에 응답할 때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이미 KDL 스타가 되기에 충분하니까요. 

이소라 기자 sora@tech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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