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동안 e스포츠를 취재하면서 정말 많은 선수들을 만났고, 취재했고, 인터뷰했고, 떠나 보냈고, 또 다시 맞이했습니다. 그렇게 만난 선수들과 관계자들만 수백명 아니 수천명인 것 같습니다. 메인 종목도 취재했지만 다른 기자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종목을 꾸준히 취재해왔기에, 어떤 기자들 보다도 많은 선수를 만났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스타가 될 선수들에게 보이는 비슷한 장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경기 내적으로가 아니라, 경기 외적으로 말이죠. 특히 경기가 끝난 뒤 인터뷰라던지, 따로 인터뷰를 할 때 레전드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장면을 연출합니다.

살아 있는 전설이자 e스포츠 그 자체인 '페이커' 이상혁. 데뷔 때부터 그를 보아왔던 기자는 얼마 전 영상 인터뷰를 통해 오랜만에 그를 만나며, 왜 그가 레전드가 됐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오래 전 그가 레전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했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자존심과 자부심의 차이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페이커'


지금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로 잘 풀어내며 인터뷰의 달인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이상혁이지만, 처음부터 그가 그렇게 말을 잘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초반에는 말이 너무 없어서 인터뷰를 하는데 애를 먹은 선수 중 한명이었죠.

그리고 그가 엄청난 스타가 될 것이라고 예감한 것은 팀이 위기에 빠진 시기, 개인 인터뷰를 했을 때였습니다. 당시 SK텔레콤 T1이 상대팀에게 엄청난 역전패를 당했고 선수들의 사기는 땅으로 떨어져 있었죠. 이상혁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위팀을 이기고 한 승자 인터뷰, 인터뷰 질문은 오늘 한 경기가 아닌 전에 역전패를 당했던 경기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이상혁이 할 수 있는 답변은 예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죠.

'페이커' 이상혁/사진=라이엇 게임즈 제공
'페이커' 이상혁/사진=라이엇 게임즈 제공

이상혁은 '그날 경기에서 상대가 어떤 점을 잘해서 팀이 패한 것 같냐'는 질문에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하지만 자신의 정확한 의도를 담아 매우 단호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상대편이 무엇을 잘했는지 분석할 시간에 우리가 무엇을 못했는지, 무슨 실수를 했는지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그 일에 집중했고요. 그래서 오늘 승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승리한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싶습니다."

답변은 매우 평범했지만 당시 이상혁이 뿜어내는 '포스'가 상당해, 기자는 이상혁의 바람대로 그날 승리한 경기에 대한 인터뷰만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었던 이상혁의 묘한 포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심하게 비굴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노력 자체가 폄하되는 것을 경계했고 승리한 것에 대한 자부심은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무언의 압박. 그것이 '레전드'가 가진 품격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재개그를 좋아하는 '페이커'로 돌아온 뒤 즐거운 인터뷰를 이어갔습니다. 그날 기자는 느꼈습니다. 이 선수는 진짜 '레전드'라는 것을 말이죠.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면 이정도의 자부심과 자신감은 가져야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포스'는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자부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2015년 올스타전, 그가 보여줬던 결정적e장면


갑자기 2015년 올스타전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당시 올스타전 취재를 위해 미국 LA로 출장을 떠났던 기자는 현장에서 '페이커'의 뚝심에 소름이 돋았던 적이 있습니다. 애니비아 장인이라 불리는 '프로겐' 헨릭 한센에게 '애니비아 미러전'을 먼저 제안한 것이죠. 올스타전에 오기 전 헨릭 한센이 개인방송에서 장난으로 "'페이커'를 1대1로 혼내주겠다"고 한 발언을 알고 있었던 '페이커'는 먼저 '애니비아 미러전'을 제안한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린 상대에 대한, 정중한 도발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팬들 역시 안 것일까요? 당시 대결에서 패했지만 장내 팬들은 오히려 '페이커'를 연호하며 그의 도전 정신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상대의 무례함을 정중하게 혼내(?)주는, 멋진 방법을 선택한 '페이커'에게 팬들은 푹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방송 카메라가 꺼졌지만 현장 팬들을 위해 포즈를 계속 취해주고 있는 '페이커' 이상혁/사진=라이엇 게임즈 제공
방송 카메라가 꺼졌지만 현장 팬들을 위해 포즈를 계속 취해주고 있는 '페이커' 이상혁/사진=라이엇 게임즈 제공

아마도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알 것입니다. 방송에서조차 다 전해지지 않았던, 현장에서 '페이커' 이상혁이 보여준 엄청난 자부심의 '포스'를 말입니다. 그는 패하고 온 뒤에도 기자실 인터뷰에서 시종일관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자부심이 넘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레전드의 품격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보여준 것이죠. 


공항에서도 빛났던 '레전드'의 품격


사실 '페이커' 이상혁을 잘 알지 못했던 기자는 올스타전의 그장면으로 인해 엄청난 선수가 e스포츠에 등장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공항에서 다시 만났을 때, 레전드의 품격을 보여준, 또 한번의 '결정적e장면'을 목격하게 됐습니다. 

당시 선수들은 해외 일정이 끝난 뒤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타기 위해 공항에서 대기 중이었습니다. 선수들을 알아 본 외국 팬들은 이번 올스타전에 대한 소감과 한국으로 복귀한 뒤 일정이나 각오 등 간단한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몇몇 선수들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하품을 해대거나, 대놓고 이어폰을 끼는 등의 행동을 보여줬습니다. 외국 팬들이었지만 정말 팬이었는지 심지어 질문을 한국말로 했죠. 열정적인 팬들을 그렇게 무시하는 모습에서 제가 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오르더군요. 

그런데 당시 너무 피곤했는지 졸고 있던 '페이커' 이상혁이 벌떡 눈을 뜨더니 눈을 비비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사진을 찍고 사인을 해주면서 팬들에게 응원해줘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선수들의 태도에 민망해하던 팬들의 얼굴은 금세 환한 미소로 바뀌었죠. 자신도 정말 피곤했을 텐데, 민망한 팬들에게 팬서비스를 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왜 그가 레전드로 불리는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군복무' 문제에 '품격과 자부심'으로 답하다


'페이커' 이상혁의 진가는 '군복무' 문제에 대해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 하는 상황에서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최근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방탄소년단과 '페이커' 이상혁의 군복무를 면제해줄 수 없다면 연기해 주는 것은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오며 이슈가 됐죠.

'페이커' 이상혁이 LCK 우승 후 동료들과 기뻐하는 모습/사진=라이엇 게임즈 제공
'페이커' 이상혁이 LCK 우승 후 동료들과 기뻐하는 모습/사진=라이엇 게임즈 제공

대한민국에서 군복무 문제는 매우 예민한 이슈입니다. 이로 인해 대통령 선거가 반전이 일어나기도 하니까요. 그만큼 군복무 문제는 누구 하나 용기있게 나서서 이야기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페이커' 이상혁은 침묵 보다는 소신있게 자신의 의견을 전했습니다. 군복무를 당연히 해야 한다는 의견과 함께 "프로게이머가 다른 국위 선양을 한 분야의 사람들보다 노력이나 다른 부분들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단호하게, 프로게이머로서의 자부심을 지켰습니다.

난감한 질문도 논란 없이 하지만 프로게이머의 자부심을 지켜내는 발언으로 레전드의 품격을 지켜낸 '페이커' 이상혁이 오랫동안 프로게이머를 했으면 하는 바람은, 나만의 욕심인 것일까요?

 

이소라 기자 sora@tech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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