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캐리커쳐=디미닛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캐리커쳐=디미닛

 

"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직접 보고 오게 되니 마음이 무겁다"

열흘 간의 미국 출장 일정을 마치고 지난 24일 귀국한 이재용 부회장의 첫 마디는 '위기감'의 표현이었다.

이 부회장은 5년 만에 떠난 이번 미국 출장에서 동부와 서부를 오가는 숨가쁜 일정을 소화하며 20조원이 투입되는  제2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 설립 부지를 확정하고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버라이즌, 모더나 등의 수장을 직접 만나는 등 적잖은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성과를 자축하기엔 글로벌 공급망 위기와 미중 패권전쟁, 첨단 기술 경쟁 격화 등 이 부회장 앞에 놓인 현실이 만만치 않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 이후 급변하는 글로벌 환경은 아직도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부회장의 선친 고(故) 이건희 회장이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할 당시 세계경제는 저성장의 기미가 보이고 있었고 국내 경제는 '3저 호황' 뒤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보라"는 이건희 회장의 일성 이후 '양'에서 '질' 중심으로 뼈를 깎는 체질변화 끝에 삼성은 '글로벌 1류 기업'이란 명성을 손에 넣었다.

'승어부'를 꿈구는 이재용 부회장의 '뉴삼성' 역시 결코 순탄치만은 않은 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출장 중 이 부회장은 선행연구조직 연구원들에게 "추격이나 뒤따라오는 기업과 '격차 벌리기'만으로는 거대한 전환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며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아무도 가보지 않은 미래를 개척해 새로운 삼성을 만들어가자"고 당부했다.


승어부의 시작은 2030년 시스템 반도체 1위

이재용 부회장의 뉴삼성의 키워드는 '개척'이다. 더 이상 선친이 남겨둔 1위 자리를 지키는 데만 만족할 수 없다는, 스스로 새로운 1등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현재 삼성의 대표적인 글로벌 1등 제품은 메모리 반도체, 휴대폰, TV 등이다. 삼성이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한 건 1993년이다. TV는 2006년, 휴대폰은 2012년에 각각 세계 1위 자리에 올랐다. 10년 넘게 새로운 1위 타이틀이 보이지 않는다.

이에 이 부회장이 내놓은 뉴삼성 계획 중 가장 중요한 카드는 지난 2019년 발표한 '2030 시스템반도체 비전'이다. 이는 2030년까지 현재 선두인 메모리반도체 뿐만 아니라 파운드리를 포함한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도 1위를 차지하겠다는 계획으로, 삼성은 총 171조원의 투자계획을 세웠다.

그렉 애벗 미국 텍사스 주지사(앞줄 가운데)가 23일(현지시각) 자신의 관저에서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앞줄 오른쪽), 존 코닌 상원 의원과 함께 삼성전자의 파운드리(시스템반도체 위탁생산) 제2공장 부지를 텍사스주 테일러시로 결정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제공
그렉 애벗 미국 텍사스 주지사(앞줄 가운데)가 23일(현지시각) 자신의 관저에서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앞줄 오른쪽), 존 코닌 상원 의원과 함께 삼성전자의 파운드리(시스템반도체 위탁생산) 제2공장 부지를 텍사스주 테일러시로 결정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제공

이 부회장의 출장 중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로 부지가 최종 결정된 신규 파운드리 라인은 평택 3라인과 함께 삼성전자의 '시스템반도체 비전 2030' 달성을 위한 핵심 생산기지 역할을 할 전망이다. 이번 라인 건설로 기흥·화성-평택-오스틴·테일러를 잇는 삼성전자의 글로벌 시스템반도체 생산 체계가 완성됐다.

파운드리 분야의 경쟁사는 대만 TSMC와 미국 인텔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랜드포스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올 2분기 기준으로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17.3%의 점유율로 52.9%를 기록한 1위 TSMC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수치상으론 격차가 크지만, 첨단 미세공정으로 분류되는 10나노 이하 공정 점유율에선 TSMC와 삼성이 6대4로 시장을 나누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TSMC를 잡을 삼성전자의 무기는 선단공정이다. 삼성은 경쟁사 대비 가장 앞서 내년 상반기 차세대 GAA(Gate-All-Around) 기반의 3나노미터(㎚) 반도체 양산을 추진하면서 기술 격차를 벌린다는 계획이다. 반도체는 회로 선폭을 줄일수록 저전력·고효율 칩을 만들 수 있어 앞선 공정을 보유하면 고객사 확보에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경쟁사 TSMC는 내년 하반기에나 3나노 양산에 나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경기 평택에 위치한 반도체 사업장을 방문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사진 = 삼성전자
경기 평택에 위치한 반도체 사업장을 방문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사진 = 삼성전자

인텔이 파운드리 시장에 뛰어든 건 '변수'로 꼽힌다. 지난해 차량용 반도체 부족을 시작으로 팬데믹 이후 경제회복의 가장 큰 난제로 떠오른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문제는 미국이 한국과 대만에 의존하던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 내로 다시 끌어들이게 만들었다. 바이든 행정부는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이에 호응한 인텔은 파운드리 시장에서 새 활로를 찾고 있다. 인텔은 첨단 미세공정에선 삼성과 TSMC에 다소 밀리고 있지만, 2025년 1.5나노급 제품을 선보이겠다고 선언하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과거 파운드리 사업에서 한 번 실패를 맛 본 인텔이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건 미국 정부의 강력한 지원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이번 미국 출장에서 반도체 인센티브 법안을 담당하는 연방의회 의원들을 만나 한국 등 해외 기업이 미국에 투자할 때도 미국 기업과의 차등 없이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인텔이 외국 기업에는 인센티브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데 따른 대응 차원으로 풀이된다.


'바이오 주권' 수호하고 '제2 반도체 신화' 만든다

이 부회장의 다음 목표로는 '바이오 1위'가 꼽힌다. 지난 8월 가석방 후 전략사업 주도권 확보를 위한 총 240조원의 투자계획을 발표하며 바이오 산업에서 바이오시밀러와 바이오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강화를 통해 '제2의 반도체 신화'를 창출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사진=삼성바이오로직스
/사진=삼성바이오로직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CDMO 분야의 글로벌 1위를 목전에 두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현재 단일 공장 기준 세계 최대 생산시설인 3공장을 확보하고 있고, 여기에 더해 1조7400억원이 투입되는 인천 송도 4공장이 완공되면 생산 규모를 총 62만 리터까지 늘리며 CDMO 분야의 글로벌 1위로 우뚝 선다. 회사 측은 이후 5·6공장 건설 계획도 밝힌 상태다.

실적도 순항 중이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삼성바이오로직스에 적극적인 러브콜을 보냄에 따라 올 3분기 누적 수주액은 약 8조3450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말보다 15% 가량 증가한 규모다. 이에 힘입어 올 3분기까지 누적 매출액은 1조1237억원, 영업이익은 4085억원을 달성했다. 이는 모두 지난해 연간 매출액과 영업이익을 넘어서는 수준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바이오 산업은 고부가가치 산업을 넘어 '국가 안보산업'으로 변모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만큼, 이 부회장은 바이오 주권 확보를 통한 '사업보국'과 새로운 주력사업을 키운다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6일(현지시간) 미국 매사추세츠주 캠브리지에서 만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과 누바 아페얀(Noubar Afeyan) 모더나 공동 설립자 겸 이사회 의장 / 사진=삼성전자 제공
16일(현지시간) 미국 매사추세츠주 캠브리지에서 만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과 누바 아페얀(Noubar Afeyan) 모더나 공동 설립자 겸 이사회 의장 / 사진=삼성전자 제공

이번 미국 출장길에도 이 부회장은 가장 먼저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로 날아가 누바 아페얀(Noubar Afeyan) 모더나 공동 설립자 겸 이사회 의장을 만나 협력방안을 논의했다. 이들은 지난달 모더나의 코로나19 백신 243만5000회분 국내 조기 도입 사례를 거론하며 중장기적 협력 확대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모더나와 백신 원액 생산 등으로 협력을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또 바이오 의약품뿐 아니라 백신, 세포 및 유전자 치료제 등 차세대 치료제 위탁개발생산(CDMO) 시장에도 진출한다는 계획이다.


폴더블폰 성공으로 '퍼스트 무버'로 거듭난다

폴더블폰도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개척'하고 있는 분야로 꼽힌다. 삼성전자는 휴대폰 전체 시장에선 판매 1위를 지키고 있지만, 매출과 영업이익 측면에선 애플에 한참 못 미치는 상황이다. 여기에 샤오미를 비롯한 중국 제조사들의 약진으로 위태로운 왕좌를 지키고 있다.

폴더블폰은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삼성이 스마트폰 시장의 진정한 1위로 도약할 수 있도록 만들 비장의 카드다. 처음 등장했을 당시만 해도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던 폴더블폰은 올해 '갤럭시 Z 폴드3'와 '갤럭시 Z 플립3'의 흥행으로 가능성을 스스로 입증했다.

삼성전자 3세대 폴더블폰 '갤럭시 Z 폴드3'와 '갤럭시 Z 플립3'. /사진=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 3세대 폴더블폰 '갤럭시 Z 폴드3'와 '갤럭시 Z 플립3'. /사진=삼성전자 제공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올해 폴더블폰 전체 출하량은 900만 수준으로, 이 중 삼성이 88%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2023년까지 폴더블 시장이 10배 가까이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삼성이 75% 수준의 점유율을 유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최근 구글이 폴더블폰 출시 계획을 철회한 것으로 알려졌고, 애플도 빨라야 2023년에야 제품을 선보일 수 있을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 제조사들도 잇따라 삼성 폴더블폰의 '카피캣' 제품을 선보이고 있으나, 완성도 면에서 삼성의 최신 제품보다 한 세대 이상 뒤처져 있어 따라오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도 삼성전자는 스마트폰의 폼팩터 진화를 선도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 지난 5월 삼성디스플레이는 두 번 접는 'S폴더블'을 공개한 바 있고, 삼성전자가 'Z롤' 혹은 'Z슬라이드'라는 이름으로 롤러블폰을 내놓을 것이란 관측도 꾸준히 제기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과 구글 순다르 피차이 CEO / 사진=삼성전자 제공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과 구글 순다르 피차이 CEO / 사진=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폼팩터의 진화와 더불어 소프트웨어와 보안 강점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가고 있다. 이번 출장에서 이 부회장이 CEO들과 직접 면담한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는 갤럭시 스마트폰 생태계에 참여하고 있는 핵심 파트너들이기도 하다. 폐쇄적인 생태계를 갖고 있는 애플과는 달리 삼성은 글로벌 파트너들과의 활발한 협업과 적극적인 오픈소스 생태계 참여를 통해 개방적인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또 모바일 기기 뿐만 아니라 가전 역시 인공지능(AI) 플랫폼 '빅스비'를 탑재하고, 사물인터넷(IoT) 플랫폼 '스마트싱스'으로 연결해 주변에 모든 삼성 제품들이 '심리스(Seamless)'하게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삼성의 새로운 전략이다. 이를 통해 삼성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배터리 등 부품부터 스마트폰, 가전 등 세트, 통신 네트워크와 소프트웨어까지 아우르는 독보적인 사업 구조 간 시너지를 극대화 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남도영 기자 hyun@tech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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