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혁 님 /캐리커쳐=디미닛
김정혁 님 /캐리커쳐=디미닛

티끌 하나 없는 새파란 하늘 아래 빅토리아 왕조 건축물 사이를 비집고 새하얀 천막들이 펄럭인다. 주말 장터에는 빈티지 의류와 그림, 골동품으로 가득하고 먹거리도 달달하다. 오세아니아를 찾는 이들이 놓치면 후회하는 프리마켓에는 원주민들이 수놓은 기념품과 액세사리도 탁 트인 해변처럼 펼쳐진다. 

세계 경제에 먹구름과 금융기관의 도미노 파산을 몰고 온 금융위기로 암울한 시기에도 시드니 록스마켓은 활기가 넘쳤다. 40도로 치솟던 1월의 온도는 지하철도 멈춰 세웠지만 해변과 센트털 시티 거리마다 예술가들로 넘쳐났다.

거리의 악사, 마술사, 페인팅, 공연들은 잠시 발길을 멈추지만 에보리진 원주민의 디저리두(Didgeridoo) 연주는 심장을 멈칫하게 만든다. 때마침 호주 최대의 국경일인 ‘Australia Day’에 원주민들은 성대한 축제 대신 긴 목조악기에 숨겨진 역사의 증오를 비장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1788년 1월26일은 영국 함대와 이주민들이 에버리진의 영토인 시드니 록스에 대영제국 깃발을 첫 게양한 날이다. 매년 화려한 행사와 퍼레이드로 하늘만큼이나 푸른 국기들로 뒤덮이고 있다. 해안과 도시로부터 격리돼 황량한 서부로 밀려난 원주민들은 기념일 대신 '침략의 날'로 추모하고 있다.

호주 서부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화폐조폐국인 퍼스 민트(Perth Mint)가 화폐 역사를 고스란히 찍어내고 있다. 당시 퍼스의 금광은 유럽인들의 이민 행렬로 이어지고 조폐국은 금, 은, 동화 주조는 물론 골드바를 만들기 위한 용광로는 식을 줄 몰랐다. 

소수의 원주민이 살던 불모지 땅이 골드러시를 통해 영국의 식민지 통치를 위한 화폐 보급창으로 거듭난다. 19세기말부터 현재까지 서호주 경제의 부흥을 이끈 퍼스 조폐국은 2019년 호주 정부가 보증하는 금 기반 이더리움 토큰을 발행했다.

세계 최초의 안전자산 기반 'Perth Mint Gold Token'은 전통적인 금 파생상품을 대체할 뿐만 아니라 블록체인 플랫폼에서 실시간 거래가 가능한 가상자산(암호화폐)이다. 블록체인 기반의 토큰을 정부에서 보증하고 조폐국이 발행함과 동시에 핀테크 스타트업이 플랫폼과 유동성을 제공한다.

퍼스에는 100년이 넘는 역사와 80개가 넘는 미래형 연구기관을 보유한 호주 명문 서호주대학(UWA) 캠퍼스가 자리 잡고 있다. 디자인 공부를 하던 19세의 멜라니 퍼킨스는 학업을 중단하고 2012년에 스타트업 캔바(Canva)를 창업한다. 그는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등 그래픽 디자인 사업의 성장 가능성을 눈여겨 보았다. 퍼킨스는 값비싼 포토샵 소프트웨어와 반복되는 작업처리 과정을 동료와 함께 뒤집기 시작한다. 

사용자들의 디자인 창작물을 콘텐츠 비즈니스로 연계하고 온라인 리소스 플랫폼으로 만들어냈다. 'Keep it Simple'이라는 모토 아래 사용자, 디자이너, 광고주들의 불편사항을 해소하고 간결함과 핵심업무에만 집중한 아이디어는 파괴적이고 실용적이었다. 현재 시장가치는 30억달러를 넘어서고 190개국에서 매월 2000만명의 이용자가 사용 중이다. 퍼킨스는 대학 시절의 힘들고 어려웠던 그래픽 강의를 간편하고 저렴한 툴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했다. 

스타트업은 호주 내 새로운 일자리 창출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다. 최근 호주의 벤처 캐피탈 투자규모는 사상 최고치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정부의 핀테크 스타트업 생태계의 혁신과 촉진 그리고 지속적인 규제개혁과 투명한 스타트업 경영방식은 실리콘밸리의 모험자본을 끌어들이고 유니콘 기업들의 탄생을 이끌어 내고 있다.

세계 핀테크 시장의 톱5에 속한 호주는 뉴사우스웨일스(NSW)주가 경제의 핵심지이면서 핀테크 서비스 창출의 진원지이다. 전세계 글로벌 투자은행이 진출해 있으며 대부분이 시드니를 거점으로 하고 있다. 시드니는 호주의 경제 심장이자 4차 산업혁명의 요충지다. 향후 호주의 핀테크 산업은 괄목할 성장이 예상되며 시드니는 전략적 규제 샌드박스를 더욱 펼쳐 나갈 계획이다.

혁신기술에 투자하는 기업과 엔젤 투자자에 대한 세금 우대정책 보다 시드니에서 스타트업 설립을 추진하는 외국인에게 영주권 취득이 가능한 비자 우대 정책은 큰 효과를 보고 있다. 구글은 시드니대학 캠퍼스에 핀테크 창업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고 중앙은행의 금융결제 공동망 프로젝트에 정부와 은행, IT기업이 적극 참여하는 등 핀테크 인프라 조성에도 활기가 넘친다.

193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호주는 파도파도 끝이 없는 천연자원과 광물로 축복받은 땅에서 풍족하게 살아왔다. 광활한 청청 방목지역에서 자라는 투플러스 소와 양은 헤아릴 수도 없다. 영국의 죄수들이 첫 상륙한 록스에는 1816년 오픈한 펍 캐드맨스 오두막부터 하버브릿지까지 보석 같은 역사속의 선술집들이 저마다의 척박한 이야기를 블록으로 연결해주고 있다.

하버브릿지는 촉촉한 야경과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으로 밤의 로맨틱을 발산하는 달링하버와 맞닿는다. 시드니 밤바다 야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이자 고백의 성지이다. 어두워질수록 빛나는 오페라하우스는 핀테크 스타트업의 역경과 좌절을 밝혀주고 나아갈 방향을 깨워주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시드니는 이제 축복받은 땅에 의존하지 않고 핀테크라는 새로운 금맥을 채굴해 혁신적인 젊은 열기와 탄탄한 캐피탈을 끌어들이고 있다. 시드니 달링 하버는 핀테크라는 새로운 오페라의 전주곡을 매일 밤 불꽃처럼 쏘아 올리고 있다.


글=김정혁
정리=허준 기자 joon@techm.kr

<Who is> 김정혁 님은?
서울사이버대학교 빅데이터·정보보호학과에서 핀테크보안과 블록체인을 강의하고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 컨설팅업체인 온더블록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은행 전자금융팀장을 역임하고, 한국블록체인협회 자문위원 겸 자율규제위원, 부산블록체인규제자유특구 분과위원, 하이브랩 어드바이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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