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혁 님 /캐리커쳐=디미닛
김정혁 님 /캐리커쳐=디미닛

2000년 국제전자상거래 컨퍼런스에 초대돼 베이징을 사전 답사했다. 첫날 숙소는 베이징 외곽 청나라 황제 행궁과 사찰이 있던 향산공원이었다. 중국혁명을 이끈 모택동이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첫 개최한 곳이기도 하다.

대회의장과 세미나 장소, 전시회 부스 공간을 점검하면서 난감했다. PC통신이나 인터넷을 개통하는데 6개월 이상 소요되고 비용도 적지 않았다. 서울에 급히 연락해 온라인 시연이 어려운 상황이니 데모용 버전을 달라고 요청했다. 컨퍼런스 첫날부터 전시회 부스에 몰려든 중국 금융회사와 IT기업들에게 한국의 사이버트레이딩과 정보보안을 홍보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증권사 점포에서만 주식거래를 하던 베이징은 한국에서 가져간 인터넷폰, 인터넷TV, 휴대용 무선단말기에서 이뤄지는 증권거래에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다. 당시 중국의 대형 증권사는 물론 증권거래소, IT기업들의 한국방문이 쇄도했던 계기가 됐다.

공식 행사를 마치고 출국하기 전 발길은 중관춘 전자상가로 향했다. 수도 베이징의 난개발과 마구 뿜어대는 차량들의 매연, 쓰나미 같은 무단횡단 인파, 신호등 없는 자전거와 차량의 질주본능에 선진금융의 진입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볼품없는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 투박한 키보드와 마우스에다 조잡한 마더보드, 그래픽카드에 발길을 돌렸다. 용산 전자상가의 복사판과 같은 모습에 실망과 아쉬움을 뒤로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중관춘 뒷골목서 꿈틀대던 미래 '글로벌 IT공룡'들


그런데 놓친 게 있었다. 정작 봐야 할 곳은 가판대 매장에서 해외 유학파들이 개발한 기술들이었다. 중관춘 뒷골목에서 미래의 글로벌 IT공룡들이 꿈틀대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작은 점포에서 출발한 징둥닷컴은 중국은 물론 세계 전자상거래업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징둥의 정가 정품 전략과 서비스는 짝퉁천국에서 짝퉁이라는 단어를 소멸시켰다. 오프라인에서 이커머스로 주력사업을 바꾸면서 택한 저가전략은 춘추전자시대를 평정했다. 중국 최대 경쟁사들을 물리치고 아마존차이나를 꺽고 나스닥에 입성, 제2의 아마존으로 불리며 고속 성장한다. 당시 중관춘에는 구글, 애플의 짝퉁으로 출발한 바이두와 샤오미가 도사리고 있었다. 손익분기점을 넘어선 알리바바를 비롯한 스타트업들이 투자유치로 스케일업되고 있었다. 

나라 인구 수와 맞먹는 인구의 베이징에는 베이징대, 칭화대을 포함해 매년 20만명이 넘는 졸업생들이 배출된다. 한때 창업 붐으로 매일 1만5000개 스타트업이 설립됐다. 중국의 핀테크 유니콘 기업 수는 200개에 육박하고 있다. 중관춘에는 청년 창업자들의 기술혁신을 인큐베이팅하는 벤처캐피탈이 그들의 꿈을 찾아내고 함께 키워나간다.

2000년 인터넷 산업의 태동기부터 모방과 리모델링을 통해 성장한 핀테크 스타트업들의 발원지는 베이징 중관춘이다. 중국 정부의 유연한 규제와 시장조성자로서의 조력은 중관춘이 중국 최대의 IT산업 기지를 넘어 글로벌 실리콘밸리로 가는 주연들을 만들었다. 지금도 베이징 출신의 많은 혁신가와 기술자들이 모여 새로운 IT신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알리바바의 신선식품 허마셴셩은 베이징의 역세권, 학군을 무너뜨리고 있다. 매장과 온라인으로 결합된 장보기와 요리는 총알배송으로 신선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핀테크의 진수를 배달해준다. 알리페이로 대표되는 전자결제 서비스는 은행과 카드사의 역할을 대신하고 바이두와 텐센트, 알리바바와 같은 인터넷 기업이 금융상품을 추천해주고 시중금리보다 높은 이자를 주고 있다.


전통 금융 붕괴 시작... 베이징, 글로벌 핀테크 허브된다


예대마진과 수수료만으로 수익을 올리던 전통적인 금융 플레이어의 붕괴는 시작됐다. 이제 핀테크 기업들은 공유경제와 구독경제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베이징 시민들은 그동안 불편했지만 감수해야 했던 공급자 위주의 금융서비스를 외면하고 있다. 만리장성 같던 금융장벽과 금융업종간 경계는 조만간 허물어질 것이다.

공산주의에 기반을 둔 계획경제와 폐쇄적 정치사회로 규제가 많은 중국이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 자본시장 통제가 높지만 역동적인 핀테크 산업을 꽃피우고 있다. 핀테크는 낙후된 금융체질을 개선하고 금융혜택과 거리가 멀었던 서민들을 스마트한 디지털 소비자로 바꿨다. 최근 중국의 규제개혁 논의가 본격화되고 베이징이 규제 샌드박스 시범구역으로 지정됐다. 중국 인민은행은 '핀테크 발전 계획'을 발표하고 시범사업을 진행중이다.

베이징의 핀테크  시범사업은 사물인터넷(loT) 금융, 영세기업 간편 대출, 빅데이터 기반 모바일 뱅킹, 스마트 신용 대부, 모바일 POS 중심으로 펼쳐질 예정이다. 또한 파일럿 테스트 프로젝트에는 새로운 금융과 신기술은 모두 개방한다. 블록체인 기술과 디지털화폐(CBDC)도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과거 첨단기술 개발에도 불구하고 타이밍을 살리지 못하고 해외시장을 소홀히 했던 우리는 IT강국이라는 통계수치에 갇혀 지냈다.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수도 이후 대륙 왕조들의 행정 중심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던 베이징, 이민족의 지배와 서양제국의 침탈로 얼룩졌던 도시는 세계열강들을 보란 듯이 압도하고 있다. 글로벌 프리미엄 핀테크 허브로 우뚝 솟고 있는 베이징은 신선한 기술과 맛있는 금융이 풍미를 더하고 있다. 


글=김정혁
정리=허준 기자 joon@techm.kr

<Who is> 김정혁 님은?

서울사이버대 빅데이터 정보보호학과에서 핀테크보안을 강의하고 블록체인 컨설팅업체인 온더블록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은행 전자금융팀장을 역임하고, 한국블록체인협회 자문위원 겸 자율규제위원, 부산블록체인특구분과위원, 하이브랩 경영자문, 한패스 감사로 활동하고 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