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혁 님 /캐리커쳐=디미닛
김정혁 님 /캐리커쳐=디미닛

 

매년 여름철 날씨를 들었다 놨다 하는 장마전선은 갈수록 많은 비를 조절하지 않고 뿌리고 있다. 이제 예측 불가능한 장마시스템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에서 가동되고 있다.

긴 장마는 습도를 올려 곰팡이가 번식하고 음식이 쉽게 부패하게 만든다. 덕분에 식중독이 빈번하게 발생하기도 한다. 하루에도 날씨 변덕이 심해지는 기후변화에다 열대성기후 마저 호시탐탐 우릴 엿보고 있다.

우리와 비슷한 해양성 기후이지만 따뜻한 겨울을 가진 영국은 속절없는 비바람으로 체감온도는 급격히 떨어진다. 쨍쨍한 햇빛 보기가 어려운 날씨 덕분에 런던은 간지 나는 신사 패션의 교과서를 장식하고 있다.

습하고 흐린 하늘에 자욱한 밤안개는 1차 산업혁명과 세계전쟁 이후에도 악화일로를 걷는다. 급기야 런던 시민들은 날씨우울증이라는 기저질환에 호흡곤란과 폐질환으로 질식사하는 '그레이트 스모그'라는 최악의 공해 참사를 겪었다.

런던의 빈민촌에서 태어난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대사로 당시의 험난한 도시의 지팡이가 되어 주었다.

해가 지지 않던 나라, 영국은 한때 세계 영토의 25%를 차지한 초강대국이었다. 하지만 런던은 유난히 슬럼가와 빈민촌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상업지구와 관광지로 번화한 서부와는 달리 동부는 서민과 가난한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10년 전만 해도 런던 시티를 벗어나 북동부에 다다르면 철문으로 닫힌 공장과 주인 없는 창고들이 즐비한 쇼디치(Shoreditch) 거리가 황량하게 버티고 있었다.

80년대 전통 제조업으로 유지되던 지역경제가 무너지면서 작업 중단에 폐업, 이탈로 이어져 참담한 골목상권만 남겨졌다. 이런 지역에 금융위기 직후 좌절과 희망을 동시에 품은 신생 스타트업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패기와 도전은 우범지역으로 전락한 암울한 거리에 환한 조명을 쏘아 올리기 시작했다. 값싼 임대료와 넉넉한 오피스 공간은 혁신적인 개발자들의 입소문으로 변신을 거듭한다.

부담스러운 밑천이나 복잡한 법률 지식 없이도 회사 설립이 자유로운 쇼디치 지역은 신기술과 투자가들도 불러 들였다. 혁신적인 테크 스타트업들의 보금자리가 확대되면서 재생 불가능한 지역이 꺼지지 않는 불을 밝혔다.

2010년 취임한 신임 영국 총리는 실리콘밸리와 경쟁하는 테크시티 프로젝트를 선언하고 영국투자청은 스타트업을 위한 전담기구와 지원정책을 빠르게 확산시켜 나갔다.

펀드 조성과 성장 지원, 세제 혜택도 돋보이지만, 영국 정부는 창업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는데 전념했다. 테크시티에 입주한 스타트업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3년만에 1만3000개 넘는 청년 사업가와 5000개 넘는 첨단기술 업체들이 집결했다. 글로벌 공룡기업들과 대형 금융회사, 대학 연구소들의 런던 진출과  투자처 발굴도 활발해졌다. 

이제 런던 동부는 세계 3대 창업 클러스터와 최대 규모의 핀테크 산업 단지로 성장했다. 사실 핀테크의 출현과 성장을 세상에 보여준 동네는 런던의 '테크시티'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다. 테크시티의 성공을 기반으로 영국 전역에 디지털혁신 허브를 조성하는 '테크네이션' 프로젝트는 1조원 규모의 벤처캐피탈, 수조원의 매출로 일자리도 자연스럽게 급증시켰다.

정부 산하에 '테크시티투자청(TCIO)을 론칭하고, 법인세 지원, 비자 발급, 창업지원까지 이어지는 프로그램은 폐업까지 도맡아 실패와 좌절에 대한 부담을 없앴다.

은행의 개발자와 트레이더로 일하던 러시아의 블라드 예첸코와 니콜라이 스토론스키는 변화하지 않는 금융시스템에 반기를 들고 런던으로 향한다. 요지부동 금융서비스를 뒤집기 위한 그들의 구호 'Beat the Banks'에 소비자들은 유니콘으로 답해줬다. 화폐와 통화 그리고 수수료 차별을 없애려는 그들의 포용 노력은 런던은 물론 유럽 전역을 사로잡았다.  

자생적인 재생 뉴딜을 창조한 테크시티는 영국 정부의 과감한 ICT 지원정책으로 유럽의 수많은 청년 스타트업의 성지로 자리잡았다. 그동안 핀테크 시장에서 실리콘밸리가 독차지 했던 주장 완장은 이제 테크시티로 넘겨졌다.
 
대영제국의 쇠퇴기를 상징했던 런던스모그는 푸르른 청년사업가와 신선한 스타트업 클러스터 덕분에 청명한 하늘로 뒤바뀌었다.   

예술, 문화 콘텐츠의 발상지 런던은 세계 금융의 심장부이자 상업의 중심지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런던의 창의성 높은 유전자 세포는 그대로 세습돼 미래를 결정짓고 있다.

거세고 성가신 장마전선도 실용적 사고와 강대한 비전으로 비온 뒤 땅을 더욱 굳히고 있다. 비오는 날 해안 펍에서 맞이한 '피쉬앤칩스'와 조지 마이클의 'Careless Whisper'는 늘 그립다. 런던 동부에서 태어난 그는 천국의 끝에서 핀테크 본고장의 속삭임을 응원하고 노래하고 있을 것이다.

 

글=김정혁
정리=허준 기자 joon@techm.kr

<Who is> 김정혁 님은?
서울사이버대학교 빅데이터·정보보호학과에서 핀테크보안과 블록체인을 강의하고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 컨설팅업체인 온더블록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은행 전자금융팀장을 역임하고, 한국블록체인협회 자문위원 겸 자율규제위원, 부산블록체인규제자유특구 분과위원, 하이브랩 어드바이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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