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혁 님 /캐리커쳐=디미닛
김정혁 님 /캐리커쳐=디미닛

"사토시 나카모토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국방프로젝트 연구에만 전념하고 있는 실존 인물입니다."

칼텍에서 퇴직하고 도쿄로 돌아온 노교수는 두툼한 안경을 고쳐 쓰면서 확신에 찬 강한 어조로 연단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개인간 전자화폐 시스템' 논문을 게시한 비트코인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는 아직까지 확실한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도쿄 한복판에서는 비트코인 핵심 개발자가 일본계 교수로 믿는 분위기다. 행사장을 가득 메운 청중 가운데 누구하나 손들고 의문을 제기하거나 부연 설명도 없는 축제 분위기이다.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를 배출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과 일본의 금융IT기업 그리고 구글, 시스코 등 글로벌 기업이 참여한 도쿄의 이노베이션 연구센터 창립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출현하기 이전 따스한 봄 햇살 아래 성황리에 마쳤다. 


도쿄 이노베이션 연구센터 창립식을 다녀왔다

한국의 핀테크와 블록체인, 가상자산을 자문해주는 어드바이저 자격으로 도착한 도쿄는 하계올림픽 개최를 위한 스타디움 건설이 한창이었다. 

화사한 봄날의 창공을 뚫고 착륙한 하네다 공항은 기차와 지하철, 리무진버스가 촘촘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복잡하고 어려운 대중교통에도 가는 곳마다 세븐일레븐 ATM에서 현금을 인출하는 모습은 자주 목격된다. 행사장이 위치한 니혼바시로 향하는 버스의 유리창은 경제대국 심장부의 맑고 푸른 파노라마 시티뷰를 아낌없이 스트리밍하고 있었다.

오후 식순이 끝나고 이끌려간 니혼바시 골목의 고풍스러운 건물은 150년을 8대째 운영하는 전통식당이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일식요리와 현대적인 서비스가 잘 융합됨에도 파괴적인 가성비를 제공하고 있다. 잘 보존된 목조주택 계단에서 흘러나오는 깊은 세월의 잡음과 자연친화적 다다미와 미닫이에서 투영되는 프라이빗 매트릭스는 가깝고도 먼 이웃의 음식을 곱씹기 좋은 공간이다.

무한으로 제공되는 사케와 소츄 그리고 겹겹이 쌓아올린 해산물 플레이팅은 적은 양, 높은 가격으로 기억된 정통일식에 대한 편견을 조금이나마 씻겨 주었다.

도쿄에서 들른 커피숍과 식당에는 재떨이가 정성스레 제공된다. 자리에 안자마자 스스럼없이 담배를 물고 자욱한 연기를 생산해내도 누구하나 불만이 없다. 오랜만에 면전에서 직접 맡아 보는 유독성 향수 물결에 밀려오는 금단증상 데자뷰가 고통스럽기만 하다.

숙소와 업무 장소들이 위치한 니혼바시 지역은 일본 금융경제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본 최초의 은행인 제일국립은행이 자리 잡고 도쿄증권거래소와 증권사, 은행 빌딩이 즐비한 월스트리트와 벚꽃송이가 휘날리는 낭만적 강변연가를 간직한 핫플레이스이다.


잇따른 거래소 사고는 '등록제'를 불렀다

연구센터는 핀테크와 블록체인, 정보보안이 주요 수행 과제였지만 가상자산은 논의조차 없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세계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인 마운트곡스의 비트코인 도난과 파산 절차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대규모 가상자산 유출사고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었다. 코인체크, 테크뷰로, 비트포인트재팬 등 주요 거래소의 보안사고는 일본 금융청의 거래정지 처분과 거래소 등록제를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그럼에도 디지털금융과 거리가 먼 일본이지만 가상자산 결제와 거래는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백화점과 게임, 식당에서의 비트코인 결제는 물론 가전제품 매장에서는 할인 적용과 세금이 면제되고 있었다. 최근 테슬라 구매 수단으로 비트코인 결제를 오락가락하던 일론 머스크보다 일본의 자동차 딜러 사이트에서 비트코인 지불방식이 먼저 도입됐다. 

이처럼 일본에서 가상자산이 지불수단으로 활용된 배경은 당시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이었다. 가상통화(가상자산) 교환에 관한 법이 통과돼 유통화폐라는 법적 지위가 확보되고 거래소와 가상자산 상장도 승인을 받아 소비자 보호라는 선제적인 장치를 구축했다. 가상자산 거래소 인가제는 소비자 보호와 투명하고 건전한 가상자산 정보를 공개해 정체불명의 거래소 난립을 억제하였다.

최근에도 전자상거래업체인 라쿠텐은 고객용 전자지갑과 연동하여 가상자산 결제를 지원한다. 적립된 포인트를 비트코인, 비트코인캐시, 이더리움과 교환하고 가맹점에서 결제수단으로 이용 가능하다.


핀테크에서 밀려난 도쿄, 현금거래 비중 가장 높은 국가 일본

태평양전쟁 패망 이후 미국의 경제지원으로 산업화가 시작된 일본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극적인 경제성장을 맞이한다. 그렇게 잘 돌아가던 일본경제는 주식과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버블경제를 맞이한다. 계속되는 경기침체와 장기불황으로 실업률 증가와 경제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종신고용, 복리후생이 핵심인 연공서열제가 뿌리 깊은 일본 기업들도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의 붕괴로 인한 경기 악화는 피할 수 없었다. 특히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금융시스템은 새로운 변화와 혁신보다는 생존과 안정을 우선시한다. 세계에서 현금거래 비중이 가장 높은 국가는 일본이다. 몸에 밴 저축문화와 현금 집착은 결제후진국이라는 평가도 순순히 받아들인다.

현금에 대한 신앙이 강하고 방방곡곡 편의점에서 24시간 현금 인출이 가능한 ATM이 현금예찬의 원동력이다. 신용카드 결제나 모바일 결제가 보편화되지 않은 이유도 개인정보 노출을 꺼리는 국민성과 불필요한 수수료 낭비를 줄이는 검소함의 유전인자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최근 발표한 글로벌 핀테크 생태계 보고서에 도쿄는 20위권 밖으로 밀려나 있다. 모바일금융, 사이버 보안, 캐시리스, 규제개혁 등 어느 부분에서도 도쿄는 성숙된 디지털금융의 잠재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3월 일본의 중앙은행 총재는 디지털엔화에 대한 실험 착수와 주요국 디지털화폐(CBDC) 발행 일정과 보폭을 맞출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현금을 고집해 온 일본이 캐시리스 결제 확대를 정책적으로 유도하고 핀테크 활성화와 치솟는 가상자산 이슈에 대한 중앙은행의 고심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전자지갑 대신 손에 잡히는 현금소비 습관, 매장에서의 카드결제 기피 현상은 신용이 부채라는 인식이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이제 도쿄의 핀테크는 2030세대와 독신자의 전유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처럼 고도화된 전자금융인프라와 모바일금융서비스 그리고 모바일결제 혜택이 없는 한 전자결제의 확산은 아직 멀었다.

최근에서야 젊은 세대와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핀테크 바람이 일고 있다. 사전 신용조회와 지불능력 심사를 마치면 당장 현금이나 카드가 없어도 후불결제 가능한 서비스들이 나오고 있다. 임금을 선지급 해주고 잔돈을 적립하여 현금결제에 사용하고 지인들끼리 펀딩이 가능한 핀테크 앱들이 인기를 다운로드하고 있다.


'방탄금융단' 수준의 대한민국은 일본을 압도하고 있다

도쿄는 여전히 국제금융도시이자 독보적인 아시아 금융허브라고 주창한다. 그동안 수차례 세계적인 금융허브 조성을 위해 지원과 특혜를 내놓았지만 온전한 국제금융도시로 진입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

서울은 국제금융 경쟁력이 꾸준히 높아지고 핀테크 비즈니스 경쟁력 부문에서도 크게 상승 중이다. 대한민국의 정보통신 기술력과 금융공동망 인프라는 방탄금융단 수준이다. 핀테크와 빅테크 플랫폼의 혁신적인 성장 그리고 젊은이들의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은 일본 열도를 압도하고 있다

도쿄는 경제대국의 도시임에도 글로벌 기업들이 주저하는 이유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시스템, 실패를 두려워하는 도전정신,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언어장벽도 내재돼 있다. 초고령화 사회, 노동력 인구 감소, 무역적자, 저조한 투자시장, 장기화되는 불경기는 정치도 타격이지만 디지털금융도 직격탄이다. 

정치적, 외교적 타격을 입은 일본이 저지른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은 오히려 우리의 첨단 기술산업이 국산화되고 탄탄한 경제구조와 안정적인 금융체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도쿄가 글로벌 핀테크 경쟁력을 갖추고 국제금융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서울의 혁신적인 디지털금융 플랫폼을 교류하고 케이금융의 미래성장 흐름을 읽지 않고서는 우물 안 개구리로 전락할 것이다.

비트코인의 창시자는 언제가 세상에 드러난다. 살아 있는 한, 사토시 나카모토의 계정으로 채굴되거나 개인간 거래가 블록에 담아질 것이다. 역사를 부정하고 반성하지 않는 경제대국의 디지털금융은 출렁이는 비트코인의 가격 변동성만큼이나 위험스럽다.

도쿄의 코로나19 확진 증가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도 강행하는 올림픽저격은 핀테크와 디지털자산의 꽃이 피기도 전에 시들어 버릴지 모른다.

글=김정혁
정리=김현기 기자 khk@techm.kr


<Who is> 김정혁 님은?
글로벌 디지털금융 스타트업 한패스에서 디지털혁신실장을 맡고 있다. 서울사이버대학교 빅데이터정보보호학과 겸임교수로 핀테크보안,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강의를 진행 중이며 한국금융ICT융합학회, 한국디지털혁신얼라이언스, 한국블록체인협회, 블록체인포럼, 부산블록체인규제자유특구사업분과 등에서 활동 중이다.

관련기사